떡 사업을 구상 중인 한미곡씨. 떡의 원료인 쌀을 싸게 살 방법을 찾고 있다. 중국산 쌀을 수입해볼까? 정부에 문의했다. “쌀을 수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계무역기구(WTO) 시장접근물량(MMA) 관세 적용을 받는 쌀의 수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할 수 없이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봤다.

“한국은 WTO 협정에서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대신 일정량의 쌀을 5%의 낮은 관세율로 수입하기로 했다. 그 5% 관세로 수입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머리가 아파온다. 다시 정부에 물었다. “그 5% 관세 말고 (더 높은) 일반 관세로 쌀을 수입하면 안 되나?” 대답은 이랬다. “안 된다. 쌀 수입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그렇다. 지금 한국은 쌀 수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쌀을 멋대로 수입하면 최대 10년의 징역 등 형사처벌을 받는다. 다만 한국은 WTO 협정상 매년 일정량의 쌀을 수입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래서 그 의무수입물량에 대해서만 허가를 받고 수입할 수 있는 것이다(이하 ‘쌀 수입허가제’). 이 모든 것은 양곡관리법에 규정되어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중국(CHINA)’이라고 선명하게 적힌 쌀 5000t이 강원도 동해항에 입항해 하역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CHINA)’이라고 선명하게 적힌 쌀 5000t이 강원도 동해항에 입항해 하역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왜 쌀만 이런 특별대우를 받는가? ‘쌀’이기 때문이다. 쌀은 한국인의 주식이다. 쌀 없으면 못 산다. 그래서 식량안보 차원에서라도 국내의 쌀 생산 기반을 강도 높게 보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한국은 1950년 이후 줄곧 ‘쌀 수입허가제’라는 일종의 사회안전망을 양곡관리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유지해온 것이다.

따라서 만약 누구나 관세만 내면 쌀을 마음대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하려면(이를 두고 WTO는 ‘수입자유화’나 ‘시장개방’ 같은 쉬운 말 대신 ‘관세화(tariffication)’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다) 양곡관리법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물론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결정할 일이다.

한미곡씨의 고민은 깊어갔다. 그냥 국내산을 쓸까? 그런데 정부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WTO 협정상 한국 쌀 시장은 내년(2015년)부터 자동개방될 예정이다. 물론 정부가 별도로 협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정부는 2015년부터 수입쌀에 적용될 관세율(의무수입물량에 대한 5%가 아니라)도 알아서 잘 정해놓았고, 이제 9월까지 WTO에 관세율을 통보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 역시 중국산 쌀을 써야겠어! 한씨의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많은 농민들의 반대다. 한씨는 농민들 심정은 이해하지만 WTO 협정에서 이미 정해진 것을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하는 건 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협정을 위반하자는 건가?

그런데 한씨의 생각은 틀렸다. 억지 주장을 하는 쪽은 농민이 아니라 정부다. WTO 협정은 1995년 발효된 국제조약이다. 협정에서 우리가 약속한 것이 있다면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약속하지 않은 부분에서 한국은 독자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어떤 나라가 WTO 협정을 체결했다는 것은 모든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장벽을 철폐하고 자유롭게 무역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가 협상 테이블을 통해 ‘약속한 한도’ 내에서 자유무역을 하겠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6월20일 한국농어촌공사 대강당에서 ‘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6월20일 한국농어촌공사 대강당에서 ‘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한국은 쌀에 관해 정확히 무엇을 약속했는가? WTO 협정문에 자세하게 나온다.

“한국은 1995년부터 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농산물을 관세화(편집자 주:수입 허가 없이 일정한 관세만 물면 자유롭게 수입)해야 한다. 다만 쌀은 일정 물량을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조건으로 관세화 원칙에서 제외한다(‘특별 취급’). 의무수입물량은 2004년까지 점차 증량되며, 2004년의 의무수입물량 수준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한국은 2004년에 협상해서 쌀에 대한 ‘특별 취급’을 계속할지 결정해야 한다. 협상 결과 쌀에 대한 특별 취급을 계속하기로 하면 한국은 추가 양허(편집자 주:관세나 무역장벽에 대한 추가적인 약속)를 해야 한다. 특별 취급을 중단하기로 하면, 쌀을 관세화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은 2004년 다시 쌀 협상을 했다. 이후 약속을 지켜왔다. 2004년 협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약속도 했다.

“쌀에 대한 특별 취급을 2014년까지로 연장하고, 의무수입물량을 늘린다. 한국은 이 기간 중 특별 취급을 중단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쌀은 관세화해야 하고 중단 시점의 의무수입물량도 유지돼야 한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이 쌀과 관련해 WTO와 약속한 것 중 핵심적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약속들 중 어디에 ‘2014년에 협상하지 않는 경우, 2015년에는 자동으로 쌀 시장이 개방된다(이는 지금 한국 정부의 주장이다)’는 조항이 있는가? 물론 한국에 쌀을 수출하고 싶은 나라들(미국·중국 등)이야 요리조리 꿰맞춰서 그런 억지를 부려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국 정부까지 ‘쌀 시장 자동개방’을 주장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쌀 시장 개방 대책만은 일본을 배우자

한미곡씨 역시 WTO 협정문을 살펴본 뒤엔 정부의 주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럼 2015년부터는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나의 떡 사업은 어찌해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한씨의 의문에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2015년부터 뭐가 어떻게 된다는 룰(rule)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세계무역 체제의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WTO 농업협정은 ‘특별 취급 품목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을 관세화한다’는 합의를 담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과 일정은 ‘라운드(round)’라는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1995~2004년의 개방 내용과 일정은 우루과이라운드(UR)에서 정했고, 그 이후는 도하라운드(도하개발어젠다·DDA라고도 한다)에서 결정하기로 돼 있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전국농민회총연맹은 6월23일 기자회견을 열고 “쌀 전면 개방 움직임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연합뉴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6월23일 기자회견을 열고 “쌀 전면 개방 움직임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세계 각국은 우루과이라운드 때까지만 해도 10년 이후(2004년 쯤)엔 충분히 새로운 라운드가 타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타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5년 이후 세상은 어떻게 굴러갔는가? 거의 모든 국가가 우루과이라운드 마지막 해인 2004년의 개방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추가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현상 유지(stand-still)다.

쌀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한국이 2004년 쌀 협상에서 2014년까지 특별 취급을 연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협상도 2015년 이후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을 남기지 않았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 단지 2015년 전에 DDA가 타결되면 DDA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 전에 DDA가 타결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DDA는 표류 중이다. 이제 아무도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2015년부터 쌀은 어떻게 되는가? 정답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론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답은 물론 ‘현상 유지’다. 다른 나라들이 2005년 이후로 현상 유지를 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역시 2014년의 상태, 즉 쌀 수입허가제와 2014년 의무수입물량을 유지하자는 말이다. 국제법적으로 충분히 타당한 주장이다.

물론 현실은 법조문과 다르다. 우리가 현상 유지를 하면, 쌀 수출국들, 특히 미국이나 중국은 쌀 시장 개방을 요구할 것이다. 정해진 룰이 없으니 주장도 다양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일단 현상 유지를 하면서 차분히 ‘할 말’을 준비하는 것이 낫다. 그러다가 쌀 수출국들이 협상을 요구하면 여유 있게 협상장에 들어가면 된다.

굳이 그 전에 정부가 먼저 나서서 ‘2015년 쌀 시장 자동개방’이라며 협정문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오는 9월까지 쌀 관세율을 통보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필리핀도 2012년 6월 쌀 특별 취급 기간이 끝났지만, 그와 관련한 협상은 최근에야 마무리하고 있다.

관세율 공개 거부하는 정부

쌀 시장 개방에 관한 한 일본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는 ‘쌀 시장이 자동개방된다’고 앞서서 떠들지 않았다. 오히려 쌀이 수입된다 해도 자국 농가의 쌀 생산 기반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관세율을 먼저 책정했다. 그리고 쌀 시장 개방의 충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대내 정책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국민적 합의가 가능했으며, 쌀 수입 제한에 대한 법률(일본판 양곡관리법) 개정도 큰 혼란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준비했기 때문에 협상 과정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관세율을 다른 나라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WTO는 협상을 본질로 하는 체제라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쌀 수입허가제를 폐지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의 손익계산이 냉철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 계산조차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가 정해놓은 쌀 관세율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쌀 시장이 개방되면, 결국 수입 쌀이 국내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 팔리느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다.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관세율이다. 관세율을 모르면, 쌀 시장 개방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정부는 ‘쌀 관세율은 협상 대상이므로 공개하면 한국에만 손해’라며 관세율을 숨기고 있다. 틀린 말이다. 쌀 관세율의 계산 방식은 WTO 협정문에 하나의 공식(계산식)으로 나와 있다. 그 공식을 이용해서 관세율을 정하는 것은 한국의 국제법적 권리다. 한국 정부가 다른 나라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관세율을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WTO 협정문에 이미 공식이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쌀 수출국인 미국이나 중국은 한국이 그 WTO 공식에 따라 관세율을 계산했는지 검토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최근 정부에 쌀 관세율 공개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민변은 현재 ‘관세율 공개 거부를 취소하라’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민변은 또한 쌀 관세율을 결정하는 통상협정의 체결 단계에서부터 국회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하는 ‘쌀 관세율 결정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국가의 근본 이익이 달린 통상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감시해야 한다는 취지다.

불행하게도 정부의 태도는 별로 변할 것 같지 않다. 2015년 쌀 시장 개방 확정과 관세율 공개 불가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예측건대, 조만간 양곡관리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쌀 시장을 개방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할 것이다. 이제 우리 쌀의 존망은 국민과 국회 손에 달리게 되었다. 부디 한미곡씨의 떡 사업에 행운이 함께하길 바란다.

기자명 노주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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