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무엇이 실제 어떤 것인지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부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건은 그 이름으로 규정되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두고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다. 5월 광주가 대표적이다. 5월 광주에 ‘민주화운동’ 혹은 ‘항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한 과정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사회는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어떻게 명명하는가를 두고 상당한 논쟁을 벌여왔다. 극우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침략을 정당화하는 ‘대동아전쟁’을 사용하지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태평양전쟁’과 ‘15년전쟁’이다. 태평양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대립으로 전쟁을 단순화시킨다는 비판이, 15년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하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루어진 조선과 타이완·오키나와 등 식민지 침략을 간과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래서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과 시민사회는 얼마 전부터 식민지 침략까지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쟁발발일 기념하는 전쟁 명칭 드물어

이에 비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전쟁(이하 ‘한국전쟁’)을 어떻게 부를지에 대한 논쟁이 사실상 전무했다. ‘6·25사변’ ‘6·25동란’ 등으로 불리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6·25전쟁’으로 굳어져 현재는 국가 공식 행사 및 교과서에서 모두 6·25전쟁이 사용되고 있다. 한 번도 6·25라는 날짜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인데, 이렇게 전쟁 발발일만을 기념하는 명칭은 상식적이지 않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가장 결정적 문제점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특정하게 통제한다는 점이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이 ‘평화로운’ 남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는 것으로 한국전쟁의 대부분이 표상된다. 전쟁의 교훈은 ‘잊지 말자 6·25’로 귀결될 뿐이다.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언제든 침략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주입하는 방식이었다. 이 적개심과 공포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는 더 많은 무장을 갈구하고 더 많은 통제가 용인되는 병영사회가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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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느닷없는 전쟁이 아니었다. 김구는 “분단 정권의 수립은 필연적으로 동족상잔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며 이미 전쟁을 예견하고 남북한 분단 정권 수립에 반대했다. 그러나 남과 북 모두 각자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양 정권은 6·25 이전부터 이미 서로를 무력통일 하겠다며 으르렁거렸다. 이승만 정권이 북침을 감행할지 몰라 미국이 당시 한국 병력 규모를 통제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월25일 단 하루에 담기지 않는 이런 맥락을 이해할 때만이, 진정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다시는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이야기될 수 있다.

“잊지 말자 6·25”의 외침이 장악한 사회 속에서 정전협정일인 1953년 7월27일은 부차적인 날짜일 뿐이었다. “전쟁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라는 협박만 있었을 뿐, 정작 그 전쟁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는 배제되어왔다. 한국의 평화운동 단체들은 얼마 전부터 7·27을 기억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목소리를 작지만 단단하게 내고 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6·25를 극복하기 위해,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준비해야 함을 7·27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1년. 대통령까지 ‘통일 대박’을 외치는 2014년.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일본의 진보적 시민사회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통해 일본의 군국화를 막고, 가해자로서의 전쟁 기억을 확산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화를 원하는 우리는 6·25라는 낡은 이름을 넘어 어떤 이름을 만들어야 할까.

기자명 임재성 (평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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