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로베르토 볼라뇨 소설 전집 완간 소식을 들은 날, 뉴스에서 본 것은 얄궂게도 미국 텍사스 주 엘파소 도로에 세워진 섬뜩한 광고판이었다.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 조직이 경찰을 위협할 때 쓴다는 ‘플라타오플로모(PLATA·O·PLOMO:돈(뇌물)이냐, 총알이냐)’라는 글씨 아래, 올가미로 목을 죈 마네킹을 매달아놓은 검고 거대한 광고판(사진)은 볼라뇨가 소설 〈2666〉에서 직조해낸 악의 도시 ‘산타테레사’를 소개하는 웰컴보드처럼 보였다. 산타테레사는 미국 엘파소에서 25센트만 내면 걸어서 넘어갈 수 있는 멕시코의 접경도시 시우다드후아레스를 모티프 삼은 소설 〈2666〉 속의 주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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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세계 최악의 범죄 도시로 악명을 떨치는 시우다드후아레스는 살인·강간·마약·노동착취·부패와 같은 근대적 악이 일상화된 곳이다. 남미에서 생산된 마약의 최대 소비국인 미국이 마약 원산지와 분배망들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펴자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해진 시우다드후아레스는 마약 중개지로서 주목받게 되었고, 도시를 장악한 범죄 조직의 세력은 공권력으로 제어할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또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마킬라도라(값싼 노동력과 무관세, 가까운 운송 거리를 기반으로 면세 부품과 원료를 들여와 조립해서 완제품을 수출하는 멕시코 내 공장)의 여성 노동자 수백명을 대상으로 한 잔인한 연쇄 살인 역시 침묵 속에 여전히 미결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연쇄 살인이 악의 근원과 침묵의 순환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보았던 볼라뇨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지옥은 시우다드후아레스 시 같다. 그곳은 우리의 저주이자 우리의 거울이다. 우리의 좌절에 대한 불안한 거울이며, 우리의 자유와 욕망에 대한 치욕적인 해석의 거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시우다드후아레스가 처한 비극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미국을 빼놓을 수 없다. 1846년부터 시작된 ‘멕시코 전쟁’으로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등 영토의 절반을 넘기고, 재정 실패와 나프타 등을 거치며 내내 초강대국의 그늘 아래 머물러야 했던 멕시코가 국경을 맞댄 미국의 풍요와 쾌락을 위해 바쳐야 했던 희생은 뼈아프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35년간 독재를 펼치다 실각한 포르피리아 디아스는 “불쌍한 멕시코야, 너는 하느님으로부터는 참 멀리도 있고, 미국과는 너무 가까이 있구나”라는 한탄을 남겼다 한다. 더 늦기 전에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은 세계화의 폭력적 침투 아래 허물어진 국경이 어떤 지옥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우리의 국경은 과연 제대로 서 있는지 볼라뇨의 책을 통해서라도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기자명 박정남 (교보문고 M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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