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강남역 8번 출구. 어학원, 성형외과, 화장품 가게가 즐비하다. 건물 외벽을 둘러싼 각기 다른 색깔의 조명이 화려하게 빛난다. 6월4일 밤 10시, 빌딩 숲 사이 아스팔트에 850여 명이 이부자리를 폈다. 삼성전자 본사 앞이다. 4차선 도로 두 개를 텄다. 그래도 충분치 않아 삼성전자 본관 앞 삼성생명 건물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강남을 화려하게 이끄는 조명 기둥 사이에는 빨랫줄을 연결해 수건을 걸었다. 하늘을 이불 삼아 누웠다. 누운 자리에서 밤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득하게 높은 삼성전자 건물이 하늘을 가렸다.

부천, 통영, 아산, 칠곡, 해운대, 울산, 순천 등 전국에서 온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가 이곳에 모였다. 5월19일부터 노숙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무기한 노숙 농성이다. 기약이 없는 만큼 짐이 담긴 배낭과 트렁크 가방 1000여 개가 거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6월2∼3일에는 급작스러운 비를 피해 한남대교 아래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빌딩 정문은 경찰 버스 9대와 경찰 차벽 3대가 지키고 있다.

낮에는 서울 곳곳에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알리는 선전활동을 한다. 이날 오후 3시에는 조합원 518명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삼성이 죽였다’라고 노동자의 죽음을 전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518명이 5분18초간 침묵시위를 벌였다. 지난 5월18일 경찰이 자행한, 고 염호석씨(34) 장례식장 난입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5월17일 삼성전자서비스 경남양산분회장을 맡고 있던 염호석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회가 승리하는 그날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달라’던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5월18일 가족장을 치르고 싶다는 아버지 뜻을 전달받은 경찰이 장례식장에서 주검을 빼돌렸다. 어머니는 가족장을 반대했지만 1991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창수씨 주검 탈취 사건 이후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6월5일 새벽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벌였다.
ⓒ시사IN 신선영 6월5일 새벽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벌였다.
염씨는 삼성전자서비스 로고가 찍힌 유니폼을 입고 일했지만 삼성전자서비스 소속은 아니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삼성전자서비스와 계약을 맺은 협력업체 직원이다. 건당 수수료에 따라 월급이 책정된다. 고객 방문에 필요한 차량 유지비 등을 빼고 나면 매달 100만원 남짓 손에 쥐었다. 지난해 7월 노조 활동을 시작하며 주머니는 더 가벼워졌다. 회사 측은 염씨 같은 노조 조합원에게 수리 업무가 연결될 수 없게 ‘콜’을 막았다. 최근까지 염씨는 막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의 4월 임금은 41만원이었다.

7개월 전에도 비슷한 죽음이 있었다.최종범씨는 지난해 10월 목숨을 끊었다.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장례는 그가 숨진 지 54일 만에 치러졌다. 최씨가 바란 ‘노동조합 인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씨의 아내 이미희씨(29)는 한겨울에도 삼성전자 사옥 앞을 지켰다.

노조가 공개한 삼성전자서비스의 자료에 따르면, 수리기사의 임금은 ‘시급’이 아닌 ‘분급(分給)’ 225원으로 셈한다. 박성주 노조 경인부지회장은 “삼성전자서비스가 15분으로 설정한 수리를 할 경우 3375원(15분×225원)을 받는 식이다. 고객이 제품수리 이후 추가로 문의해 5분을 쓰고, 제품 수리 과정에서 5분이 더 들더라도 추가로 든 10분은 노동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야간수당과 휴일수당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건당으로 지급하고 있다. 분급 225원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고용노동부의 사업체 노동력조사 임금 통계를 인용해 책정한 것이다. 제품 수리하는 데 필요한 이동시간, 상담시간 등은 건당 수수료에 포함돼 있다”라고 말했다.

노조가 설립된 지난해 7월14일 이후 전국 33곳 협력업체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하지만 협력업체는 교섭에 응하지 않거나 교섭 원칙(교섭 장소, 교섭 주기, 임시 협약안)을 문제 삼으며 두 달을 지연시켰다. 10월이 되어서야 전국 협력업체 사장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교섭권을 위임해 대화에 나섰다.

노조에 따르면, 김해·진주·통영센터와 29차에 결쳐 교섭이 이뤄지는 동안 경총은 18차례 불참했다. 노조가 낸 125개 안 가운데 임금과 복지에 관련된 내용은 의견 접근에도 이르지 못했다. 사용자 측은 7개월 동안 이렇다 할 협상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노조 측 교섭위원은 교섭시간을 근무로 인정해달라는, 법으로 보장된 수준의 합의조차 이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지난 4월 교섭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노조는 ‘사장이 직접 교섭에 나올 것’을 요구하며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경총 측은 “쟁점 중 절반을 합의했는데, 노조가 갑자기 직접 교섭을 요구하며 일방적으로 협상을 결렬시켰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28일 이후 일주일간 재개된 교섭은 6월2일 또다시 결렬됐다.

지난해 12월6일, 춘천센터에서는 노조 탈퇴를 위한 일일활동 보고 문건이 발견되었다. 올 1월에는 전남 해남센터에서 신규 조합원에게 노조 탈퇴를 압박했다. 2월10일 영등포와 양천센터에서는 ‘생활임금 보장하라’고 적힌 노란 조끼를 입은 조합원에게 업무를 배당하지 않았다. 3월20일 남광주센터에서는 회사 측 노무팀장이 수리 기사를 미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파업했다고 해운대·아산·이천센터 3곳 문 닫아

부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지회가 파업을 벌이자 협력업체는 인근의 다른 업체 기사를 투입했다. 이는 노조가 쟁의행위를 할 때 ‘당해 사업과 관계없는 자를 채용 또는 대체’하는 것을 금지한 노동조합법을 위반한 것이다. 심지어 지난 3월 해운대센터와 아산센터, 이천센터는 문을 닫았다. 해운대와 아산센터는 90% 가까이가 노조에 가입하는 등 노조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100여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해고되었다. 3개 업체 사장은 ‘경영 약화와 건강 악화’를 폐업 이유로 들었다. 노조는 위장폐업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노숙 농성 17일째인 6월4일 ‘책 한 권, 빵 한 조각’을 나누는 자리가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마련됐다.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와 쌍용자동차 정비지회에서 샌드위치에 들어갈 재료 600인분을 만들었다. 대학생 모임 ‘도전’ 10명과 노동당 당원 박혜경씨는 이들이 만든 속을 식빵에 듬뿍 얹었다. 아이쿱생협은 유기농 빵 1000개와 식혜를 준비했다. 샌드위치 500개가 금세 동이 나고, 샌드위치를 만들던 테이블은 출판사와 작가가 기증한 책 500여 권으로 가득 찼다. 이날 저녁 마련된 문화제에서 심보선 시인은 “빌딩보다 높은 곳에서 염호석씨가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그가 하늘에서 풍물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는 낮은 곳에서 장단을 맞추자”라고 마음을 보탰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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