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는 영국에서는 보수적이라 자리매김되고 있지만 우리 기준으로 보면 보수가 아니라 오히려 리버럴하다. 그 신문(주간지이지만 신문이라 자칭)의 최근 호 아시아 문제를 주로 다루는 ‘반얀’(고정 꼭지명) 칼럼 ‘백일몽 신자들’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한반도에서 미국 군대가 없어지고, 미국 및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면, 통일 한반도를 내다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러한 상태로 가는 길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이 얼마 전에 발표한 대남 공개 질문 10개 항은 비교적 구체적이어서 얼마간 리얼리즘을 느낄 수 있다. 국가보안법 폐기 요구 등 상대방 내정에 간섭하는 항목도 있지만, 대북 군사훈련 중단 요구 등 주로 군사적 측면에 중점을 둔 것이어서 근래의 북측 태도로서는 어느 정도 구체성이 느껴진다. 비무장지대에 세계평화공원을 설치하자는 남측 제안보다는 서해 5도에 평화수역을 마련하자는 것 등이 그렇다. 아마 속내는 이명박 정권 때의 5·24 조치 철폐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눈에 띈 것은 월간 〈헌정〉에 난 박세일 교수의 글이다. 그는 보수적인 학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지만 그래도 국내 문제에는 비교적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 같았는데, 북한 문제에는 매우 강경하다. 5개 항의 주장 가운데 “투명성을 전제로, 대북 식량·의료·기본 생필품 지원을 크게 확대해야 한다”라는 정도에 공감한다.

여하간 여러 통일 논의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측이 비핵화 주장 말고는 군사적 측면에 비중을 덜 두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핵심은 6·25 전쟁 때 양측이 무승부로 끝났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천하에 막강한 미국이 새로이 일어난 중국한테 밀린 게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참기가 어려운 일인 셈이다.

정전협정이 60여 년간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않은 채 계속되는 기현상을 연출하고 있으며, 아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이라 매도하기도 했다. 아마 미국으로서는 북한을 이라크처럼 때려잡아야 직성이 풀릴 것이 아니겠는가. 북한의 내부 사정은 형편없다. 그러나 그들 뒤엔 중국이 버티고 있으니 어쩌나! 북한은 실패한 체제이고, 핵 보유는 불가한 일이지만, 여하간 그게 그리 만만치 않다.

근래에 미국이 아시아 회귀 운운하며 중국에 대한 자세를 강화하자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일본의 집단 안보 운운도 거기에 가세하는 꼴이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는 중이다. 한반도 문제는 남북의 문제이자, 그 이상으로 미·중의 문제이다. 미국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크레이지’라 했다. 다루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언론에 보도된 이종석 당시 통일부 장관의 증언을 보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주한 미군의 타이완 사태 개입을 저지하는, 동북아 평화를 위한 안보 외교를 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외교는 대북 대화인 동시에 대중국·대미국 외교

한반도 외교는 대북 대화인 동시에 대(對)중국·대(對)미국 외교다. 그 가운데 미국과의 외교가 가장 중요하다. 미국의 북한 정책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북한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고 구체화하는 절차와 함께 비핵화를 이루는 일이다. 북한 핵 문제는 돌출한 사건이 아니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지 않고 긴장을 지속해온 결과물이다. 북측의 흉계로만 몰아갈 수가 없는 까닭이다. 전반기는 북한이 대남 적화를 꿈꾸었으나 후반에 들어서서는 전전긍긍했으리라 추정한다. 소련은 붕괴했고 유일의 군사강국 미군은 한반도에 존재하고….

한반도 평화 유지 문제를 전문가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절박하기 때문이다. 평화 문제는 일반 대중의 문제로 옮아가야만 한다. 그들의 안위와 생사가 걸린 일이 아닌가 말이다. 북한 핵무기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비핵화는 범세계적인 명제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는 북한만을 몰아붙일 수도 없다. 우리 국민 모두는 얼마간은 군사 전문가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남북의 평화 유지를 위해 군사 문제에 발언을 해야겠다.

나는 서두에 인용한 ‘반얀’의 견해에 따른다. 우리는 미국과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중국과의 친선도 더욱 도모하고 한반도의 군사적 위치가 어느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미·중 수교를 튼 헨리 키신저와 같은 국제정치 정략가는 없는가. 3국 정립을 꾀했다는 제갈량과 같은 지모는….

기자명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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