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정신없이 회사에 출근한다. 야근에 회식까지 겹치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늦다. 거주하는 공간은 먹고 자는 곳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사는 대부분의 삶은 비슷하다. 동네는 어느새 노인이나 유모차를 끄는 엄마가 채운다.

‘도시 사람에게 동네는 어떤 의미일까?’ 일상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각자 거주하는 동네에서, 혹은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커뮤니티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풀뿌리 조직이다. 각 동네의 특징에 맞게 어떤 곳은 엄마가 중심이고 어떤 곳은 지역 활동가들이 터를 닦고 있으며 또 다른 곳은 20~30대 청년이 주축이다.

동네와 모임의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은 녹색이라는 가치로 모였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6월4일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각 동네의 풀뿌리 일꾼을 뽑는 날이다. 풀뿌리 일꾼에 앞서 풀뿌리 조직을 꾸리고 그 안에서 ‘동네의 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기세가 고작 1900원?
서울 상도동 ‘에너지슈퍼마켙’

“여기는 대체 뭘 팔아?” 지나가던 할머니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왔다. 간판에 ‘슈퍼마켙’이라고 달아놨지만, 과자·음료·아이스크림 등이 보이지 않은 까닭에 할머니 표정에는 궁금증이 가득했다. 슈퍼 주인 김소영씨(44)는 웃으며 “지속 가능한 미래요”라고 대답했다. 의아해하는 할머니에게 김씨는 가게에서 파는 물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식물 건조기, LED 전구, 뽁뽁이, 소형 태양광, 50초 동안 반응이 없으면 저절로 꺼지는 멀티탭(여러 개의 플러그를 꽂을 수 있는 이동식 콘센트) 등 에너지 효율 관련 물품이 주를 이뤘다.

올해 1월 ‘에너지슈퍼마켙’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곳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성대시장 안에 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로 사고 이후 에너지에 대한 관심을 키워오던 성대골 어린이도서관 사람들이 만든 가게다.

ⓒ시사IN 윤무영에너지를 전면에 내건 슈퍼는 국내 최초다. ‘엄마’들을 중심으로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에너지슈퍼는 조합원 30여 명이 함께 운영한다. 왼쪽부터 김소영, 이정은, 노성숙, 유경영씨.

이들은 성대골 에너지절전소, 에너지학교를 만들어 2012년 한 해에만 3만5000㎾/h를 절약했다. 일반 가정 1만 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 지난해에는 동네를 에너지 자립마을로 거듭나도록 만들었고, 올해는 마을기업 ‘마을닷살림’을 개설해 슈퍼를 운영한다. 매년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슈퍼에서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물품을 팔며 단열공사 컨설팅을 한다.

이름도 일부러 슈퍼마켙‘’이라고 지었다. 한국에 슈퍼마켓이 처음 생긴 1960년대 말 표기다. 에너지를 전면에 내건 슈퍼는 국내 최초이니만큼 그때 그 표기를 따라 이름을 짓자는 의도였다. ㅌ받침은 에너지의 영어 첫 글자 E라는 의미도 있다. 표기법이 달라져 결과적으로 오자가 들어간 상호 덕분에 동네 초등학생·마을버스 기사 등이 가게로 들어와 맞춤법을 지적해주고 간다. 일단 관심 끌기는 성공했다는 게 김소영 대표의 말이다.

23㎡(약 7평) 남짓한 공간은 모든 게 태양광으로 돌아간다. 자전거 발전기도 슈퍼 한쪽에 자리 잡았다. 덕분에 지난달 전기세는 1900원이었다. 슈퍼 맞은편에는 이동 자동차도 한 대 비치했다. ‘해바라기’라는 이름을 단 이동식 마을 카페다. 태양열로 커피 기계와 솜사탕 제조기를 움직인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에너지슈퍼는 조합원 30여 명이 함께 운영한다. 조합원 노성숙씨(44)는 “엄마들이 모여서 아이들 도서관을 만들고, 같이 모일 공간이 생기니 더 많은 고민들을 나누게 되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탈핵·녹색 에너지라는 말에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지금 여기서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곳이 에너지슈퍼다”라고 말했다.

지난여름, 가로수에 생긴 일
서울 은평구 ‘대안 민회’

손은숙씨(38)가 꺼내든 통장에는 ‘민원24’를 이용하고 낸 수수료 명세가 빼곡했다. 2014년 4월3일 4600원 400원 200원 300원 1500원, 4월4일 200원 200원 200원 250원 200원…. 각 정부 부처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청구 결과를 받아보기 위한 결제였다. 손씨뿐만이 아니다. 지난 5월6일 서울 은평구 민중의 집 랄랄라에 모인 지역 주민들의 통장에는 하나같이 ‘민원24’가 찍혀 있었다. 박종원씨(34)는 “정보공개가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하다 보면 계속하게 된다”라고 웃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은평구 대안 민회 제공〈/font〉〈/div〉은평구 ‘대안 민회’가 마을 천변에 농약이 뿌려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은평구 대안 민회 제공 은평구 ‘대안 민회’가 마을 천변에 농약이 뿌려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들이 정보공개 청구를 시작한 건 동네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 불광천 조성을 두고 벌어진 비리가 지역 정가인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당시 민주당)의 담합으로 대충 넘어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주민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감사 결과를 알 방법이 없던 이들은 공무원 및 관계자 징계와 조치 내역을 공개하라고 청구했다.

은평구청의 첫 회신은 딱 두 문장이었다. “2011. 7.8 행정사무조사 결과보고서를 은평구청에 이송하여 지적 사항에 대해 조치토록 함. 불광천 정비사업 등에 대해서는 감사 청구를 은평구의회 제197회 정례회에 부의하였으나 부결 처리됨.” 정작 조치한 내용은 없었다. 답변을 받고 구청에 항의 전화를 했으나, 공무원들은 담당자를 바꿔주겠다면서 계속 전화를 돌리기만 했다. 결국 정보공개 청구를 한 번 더 해서야 ‘징계 사항: 없음,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 내역: 없음’과 같은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감시의 눈이 적은 지역의회가 얼마나 안이하게 돌아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들은 ‘은평 대안 민회’라는 걸 만들 때부터, 녹색이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고 지역에서 같이 움직여보자며 은평구 노동당원·녹색당원 그리고 일반 주민이 뭉친 터였다.

정보공개 청구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이번에는 동네 가로수길에 눈길을 돌렸다. ‘아이가 뛰어놀고 어른도 쉬었다 가는 동네 불광천변의 가로수는 어떻게 관리될까’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어드마이어·로맥틴·다니톨과 같은 농약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수시로 뿌렸다는 답변을 받았다. 낯선 농약 성분을 일일이 검색해봤다. 다니톨과 로맥틴은 1급 어독성(魚毒性) 농약이었다. 다니톨은 나무에 뿌려서는 안 되는 제초제로, ‘살포된 농약이 양어장·저수지·상수 취수원·해역 등으로 날려가거나 빗물에 씻겨 직접 흘러 들어갈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는 사용하지 말라’는 취급 제한 기준이 적혀 있었다. 어드마이어는 꿀벌을 사라지게 한다는 이유로 유럽연합에서 금지하고 있는 농약이다.

보기 좋게 정비된 마을 천변에 수시로 농약이 뿌려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이들은 캠페인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몰랐을 내용이었기에 더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날인 5월5일에는 농약을 뿌리는 사람, 꿀벌 옷을 입은 사람, 나무로 분장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눠 퍼포먼스를 벌였다.

정보공개 청구로 첫걸음을 뗀 이들은 하나씩 하나씩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시 생태 등의 주제로 공부를 하는 모임도 꾸렸다. 모임의 주축인 손은숙·박종원씨는 각각 노동당·녹색당 후보로 구의원 선거에도 나섰다. 끊임없는 문제 제기로 동네를 더 시끄럽게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게 더 싸다니까요”
서울 신촌 ‘전환 도시 추진팀’

지난 1월,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로가 대중교통전용지구로 바뀌었다. 4차선이던 도로가 2차선으로 바뀌고 대신 인도가 두 배로 늘었다. 일반 차량은 지나갈 수 없고, 버스·자전거만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주말에는 아예 모든 자동차의 통행을 막는다. 늘 꽉 막히던 연세로는 어느새 걸어다니기 좋은 거리가 되었다. 서울시와 서대문구청은 장기적으로 이곳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 예정이다.

청년들의 상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비와 향락의 상징처럼 된 신촌을 에너지 자립 도시로 바꿀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단순히 차를 적게 다니게 해서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여보자는 식으로 끝나서는 곤란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신촌의 패러다임을 아예 뒤바꾸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팔을 걷어붙였다. ‘전환 도시(transition city) 추진팀’이라는 이름으로 안정배(33)·우승현(25)·이태영(29)·정현희(25)씨가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신촌을 기반으로 지역 활동을 하다 알음알음 만난 청년들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사는 곳뿐만 아니라 활동하는 곳 역시 바꾸기 위해 ‘전환 도시 추진팀’을 꾸린 이들은 2016년까지 신촌을 에너지 자립 도시로 바꾸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왼쪽부터 우승현, 안정배, 이태영, 정현희씨.
ⓒ시사IN 조남진 사는 곳뿐만 아니라 활동하는 곳 역시 바꾸기 위해 ‘전환 도시 추진팀’을 꾸린 이들은 2016년까지 신촌을 에너지 자립 도시로 바꾸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왼쪽부터 우승현, 안정배, 이태영, 정현희씨.

2016년까지 바라보는 장기 프로젝트다. 당장은 신촌 점포와 건물의 에너지 효율화 모델을 구축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시작은 신촌 상점의 LED 전환부터다. 신촌의 터줏대감인 홍익문고가 첫 삽을 떴다. 재개발로 퇴출 위기를 겪었던 홍익문고는 현재 LED 공사 중이다. 창천교회와 봉원교회도 동참하기로 했다. 이태영씨는 “우선은 가게 사장님들을 만나 이게 더 싸다고 호소하면서 설득하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꿈꾸는 에너지 효율화에 대해 슬쩍슬쩍 말씀드리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는 8월에는 신촌에 살거나 신촌에서 주로 생활하는 또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페스티벌도 열 예정이다. 단순히 친환경 재생에너지 기술을 소개하는 것뿐 아니라 신촌에도 젊은 예술가들이 판을 벌일 수 있는 만남의 장을 열 생각이다. 그렇게 뜻을 함께하는 청년들을 더 많이 모아, 내년에는 신촌 에너지협동조합을 만들고 내후년에는 옥상 태양발전소 건립과 같은 자립 시스템 구축도 꿈꾸고 있다. 안정배씨는 “우리에게 동네의 의미는 기존의 주민 운동과는 좀 다르다. 사는 곳이 아니라 늘 활동하는 곳 역시 바꾸자는 게 우리의 커뮤니티 운동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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