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5일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미 FTA의 완전한 이행’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면 한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들어갈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11월 TPP에 들어가겠다는 의향을 밝힌 바 있다. TPP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국이 협상 중인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 회원국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브루나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칠레, 페루 등 12개국. 이 나라들의 GDP를 합치면 세계 전체의 40%에 달한다.

미국이 2000년대 들어 채택한 대외경제 전략은, 1개국씩 번갈아가며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초강대국으로서 상대국을 압박하며 비교적 자율적으로 협상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미 FTA는 무역 및 투자 자유화 부문에서 가장 강도 높은 협정으로 꼽힌다. 그런데 미국이 2009년부터 주도한 TPP는 비록 ‘다자간 협정’이지만, 자유화 측면에서는 오히려 한·미 FTA보다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심지어 미국의 FTA 협상에서 제기된 바 없는 국유기업(공기업) 및 환율 관련 조항까지 거론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연합뉴스4월25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한국의 TPP 참여를비판하면서 ‘오바마 방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TPP는 한·미 FTA보다 강도 높은 무역협정으로 꼽힌다.
TPP에서 국유기업은 무역 및 투자의 잠재적 장벽으로 간주된다. 국유기업은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소비재나 서비스(물·의료·우편·교육·통신·교통·금융 등) 혹은 해당 국가의 전략산업 부문에서 활동한다. 정부는 국유기업을 보조금, 저렴한 금리의 자금 대출, 정부 조달(공기업의 상품 및 서비스를 정부가 매입) 등으로 지원한다. 그래서 국유기업과 민간·해외 기업 간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TPP의 시각이다. 예컨대 해외 보험사들은 공적 의료보험 회사라고 할 수 있는 건강보험공단 때문에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 어렵다고 불평할 수 있다.

TPP 회원국들은, 국유기업과 국내외 민간기업이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려면 정부 지원을 제한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조항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여왔다. 지난해 12월13일 나온 미국 의회리서치서비스(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미국·싱가포르 FTA의 관련 규정을 근거로 TPP 협상안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싱가포르 정부는 국유기업들이 오직 상업적(편집자 주:국익이나 공공성이 아니라) 고려에 따라 상품 및 서비스를 거래하도록 보장해야 한다”이다. 국유기업이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의 도구로 활용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TPP 회원국 가운데 개도국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기준이다. 개도국은 전략산업 부문에 국유기업을 배치해 경제개발을 추진한다. GDP에서 국유기업 부문의 비중(베트남은 40%)도 상당히 크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미국·일본 등 선진국 경제에서도 국유기업(공기업)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미국의 경우, 우체국(Postal Service), 서민 주택대출 기관인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 등 사실상의 거대 공기업들이 활동 중이다. 자산 규모 300조 엔(약 3000조원)으로 세계 최대 금융 공기업인 일본 우정국은 우편 및 보험 서비스 등을 공급한다. 더욱이 일본 국채를 대량 매입하는 방법으로 이 나라의 재정을 떠받치고 있기도 하다.

더욱이 미국·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의 공기업 조항이 미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이 TPP에 제안한 관련 조항 역시 ‘연방정부(중앙정부)’ 차원의 국유기업 지원만 문제 삼는다. 미국의 경우, 주(州)나 시(市) 등 지자체는 국유기업을 지원해도 TPP 조항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모든 TPP 회원국들이 다른 나라에는 ‘국유기업(공기업) 무력화’ 조항을 적용하고 싶어하면서도 자국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타결이 더욱 지체된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제인 켈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교수(법학)가 최근 토론회에서 말했듯이 “(지금까지 진행된 TPP 협상에서) 국유기업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범위가 합의되지 못했던 것”은 이 때문일 터이다.

그런데 최근 TPP의 국유기업 논의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 통상 전문 잡지인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2월28일자)는, 지난 2월 말 TPP 협상에서 ‘국유기업 관련 조항의 완화’가 결정되었다고 보도했다. “국유기업이 자국 내에서만 서비스를 공급하는 경우에는 이에 대한 정부 지원에 TPP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국유기업에 대한 이런 관대한 조치는, 우정국 문제로 고민하는 일본과 국유기업 비중이 큰 개도국들을 TPP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이자 비상 대책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0월18일자 베트남 매체(〈베트남 브리지〉)는 TPP 회원국들이 국유기업 관련 조항을 베트남·말레이시아·페루·브루나이 등 개도국에 대해 5년간 유예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자동차협회의 황당한 환율 조작국 색출법

한편 미국 의회와 업계가 ‘환율 조작’ 관련 조항을 TPP에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협상의 최종 변수로 떠오를지 주목된다. 포드·크라이슬러·GM 등을 대변하는 미국 자동차협회(AAPC)는 지난해 12월4일 낸 성명서에서 “미국 정부는 이번 기회(한국의 TPP 참여 요청)를 활용해서 한국 정부의 잦은 환율시장 개입에 대처하라”고 주장했다. 또 한·미 FTA 이후에도 한국 측의 은밀한 비관세 장벽 때문에 자동차를 수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미국 자동차협회의 방안은 ‘환율 조작국’을 색출한 뒤 최소 1년 동안 징벌성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환율 조작국을 색출하는 방법이 매우 황당하다. 6개월간 계속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외환보유 규모가 ‘3개월간 수입물량 가치’보다 높은 나라는 환율 조작국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이라면 한국, 중국 등 수출대국은 환율 조작 혐의를 피할 수 없다. 미국 시민단체인 ‘퍼블릭 시티즌’의 간부 로리 왈락에 따르면, “미국 의회에서는 민주당·공화당 의원 대다수가 환율 조작에 대한 구속력 있는 규제를 TPP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한국은 TPP에 들어가려다 터무니없는 말썽에 휘말릴 수 있다. 우선 한국은 TPP 협상에 참여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20일자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에 따르면,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보는 당시 이미 “미국과 다른 회원국들이 협상의 종료 단계에 와 있기 때문에 한국이 새로운 협상자로 들어올 수는 없다. 한국이 (미국 자동차 업계의 불평 등) 한·미 FTA의 쟁점 사항 4가지를 풀어나갈 의지가 있는지 살펴본 뒤 TPP 가입 여부를 평가해보겠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기존 TPP 회원국들이 앞으로 타결할 사안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TPP에 가입할 수 있다. 게다가 가입에 앞서 한·미 FTA와 관련한 미국의 요구 사항들을 수용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미국에게 자동차 시장 등을 내준 뒤 TPP의 엄격한 국유기업 조항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 일본·베트남·말레이시아 등에 적용될 수 있는 예외 규정에서도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미국은 TPP를 빌미로 한국의 ‘환율 자주성’을 압박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는 TPP 자체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중국은 주요 기업 중 대다수가 국유기업일 뿐 아니라 거의 매년 미국 의회로부터 환율 조작국이라고 비난받는 나라다. 따지고 보면 TPP 관련 논란(국유기업과 환율 조작)의 진정한 과녁은 중국이다. 이런 점들을 면밀하게 따져보지 않으면, 한국이 자칫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될 수도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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