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3일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30대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사흘 전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다섯 살 아들도 함께였다. 유서에는 ‘최선을 다해 치료했는데도 호전이 안 돼 힘들다’ ‘(의사에게) 완치가 안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3월2일에는 경기도 동두천에서 네 살배기 아들의 더딘 성장을 고민하던 30대 주부가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일이 있었다. 2013년 11월 서울 관악구에서는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17)을 돌보던 40대 가장이 아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땅에서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 힘든 아들은 내가 데리고 간다.” 그가 남긴 유서의 일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현재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아이가 커갈 때마다 각기 다른 고비를 넘고 있었다. 엄마와 아이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한국의 발달장애인은 2012년 현재 19만명이 넘는다. 가족까지 포함하면 70여만 명이 발달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다. 지난 4월2일은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이었다.
 

ⓒ시사IN 신선영경기도에 위치한 장애인가족지원센터.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의 치료가 끝난 후 다른 치료를 받기 위해 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 판정 당시-‘설마 우리 애가?’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잠든 아이 옆에서 신지영씨(38)는 도종환 시인의 시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읽었다. 자신의 인생에도 2막이 있을까 생각했다.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신씨의 둘째 아들 현준이(6)는 3월19일 자폐성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신씨는 원래 노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10년을 일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급여는 적어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겼다. 중학교 1학년인 첫째를 낳았을 때는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일을 계속했다. 둘째 현준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처음 썼다. 1년 뒤 복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신씨는 결국 일을 그만뒀다. 24개월쯤 되던 때부터 현준이의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사IN 신선영자폐성 장애가 있는 두 아들은 손을 놓으면 인도와 도로를 구분하지 않고 마구 달린다.

 

“그 전까지는 느리지만 정상적으로 발육하는 것 같았어요. 단지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그런데 24개월쯤 되니까 눈 마주침이 안 되고 산만한 게 보이더라고요. 말이 안 되니까 일단 언어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아니겠지, 아니겠지 했어요. 2년 정도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죠.”

많은 아이 엄마들이 진단보다 치료를 먼저 받는다. 신지영씨도 그랬다. 큰 병원에서 MRI 등 초기 검사를 받으려면 비용이 100만원 정도 든다고 했다. 맞벌이인 데다 첫째도 있는 상황에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진단을 받든 안 받든 센터에 가서 치료받는 건 똑같다’는 글귀를 발견하고는 치료를 먼저 하기로 했다. 회당 1만~2만원 하는 복지관 치료는 ‘포화 상태’였고, 시간당 3만5000원 하는 사설 센터는 금액이 부담이었다. 센터 선생님은 “어머니, 확정하긴 어렵지만 아이가 자폐일 수도 있어요. 목소리 톤이라든가 이런 게…”라고 말했다.

‘설마 우리 애가?’라는 생각은 점점 옅어져갔다. 아이는 엄마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리 타일러도 김치냉장고 버튼을 끊임없이 눌러댔고, 버스에서는 벨소리를 입으로 크게 따라했다. 집에 가는 길에는 꼭 놀이터에 들르고, 자전거 주차대를 밟고 지나가야 했다.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수영이나 놀이학교를 다니면 나아질까 했지만 좀처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다른 애들은 다 선생님 쳐다보고 말을 듣는데 얘는 혼자 구석에서, 뭐 떨어뜨려서 굴러가는 것만 계속 관찰하고 있는 거예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생각했죠. 아, 얘가 정말 자폐인가 보다.” 아이가 커가면서 자폐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얘가 완전히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애인가 보다, 아이한테 희망이 없구나 생각하면 우울했죠. 큰애한테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어요. 혼자 있을 때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시사IN 신선영발달장애 아이를 등교시키고 있는 어머니.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부모의 고민은 더 깊어진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시간이 너무 적다.

 

신씨는 교회에 나가고 같은 처지에 있는 엄마들을 만나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장애인 등급 2급이 선명하게 찍힌 복지카드가 나왔을 때는 또 한번 마음이 출렁였다. “자폐지, 자폐지 하면서도 막상 ‘증’이 나오니까 다르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장애인이구나 싶고. 그것도 3급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2급인 거예요. 장애인 차량 표지판도 같이 나왔는데 그건 차마 차에 올려놓기가 그래서 아직 가방에 있어요. 인정했다 하면서도 아직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낙인이 찍히는 것 같아서.”

현준이가 학교 갈 나이가 되다 보니 신씨는 고민이 많다. 일반학교 특수학급과 특수학교 사이에서의 고민이다. “큰애 키울 때 저도 그랬거든요. 우리 애는 모자란 애보다는 좀 더 괜찮은 친구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일반학교에 애를 보내려니 고민이 많이 되죠. ‘왜 저런 애가 우리 학교에…’라고 다른 엄마들이 생각할까 걱정도 되고. 점점 클수록 티가 날 텐데, 준비 안 된 아이를 사회에 내모는 듯한 느낌도 들고.” 학교에 가면 엄마들 사이에서 ‘왕따’는 기본으로 각오해야 한다는 다른 엄마들 얘기를 들으며 신씨는 한숨이 깊어진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인 뒤에도 넘어야 할 벽이 이어진다.

 학령기-또 한 번의 죽을 고비, 사춘기

외동딸 지현이(17·자폐성 장애 1급)를 키우는 진경미씨(45)는 아이를 키우며 죽을 고비가 두 번 왔다고 했다. 장애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 한 번, 그리고 지현이에게 사춘기가 왔을 때 한 번. “사춘기 때 아이들 지원이 있는지 인터넷을 뒤져봤는데 하나도 없어요. 예를 들어서 생리를 하면 기분이 좀 안 좋을 때가 있잖아요. 근데 표현을 제대로 못하니까, 툭 하면 집에 있는 액자를 던지고 문짝이 날아가고. 아무 때나 소리 지르고 우는 거예요.”

아이와 한 시간 같이 있는 게 어릴 때 5~6시간을 보내는 ‘강도’와 비슷해졌다. 진씨는 무엇보다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놀 문화공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지현이는 키즈 점프(트램펄린) 이런 거 정말 좋아해요. 그나마 키가 작으면 초등학교 3~4학년 때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데, 사춘기 장애 아이들이 가서 놀 만한 곳이 전혀 없어요.” 현재 정책은 ‘교육’과 ‘치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아이들이 여가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다. 부모가 정서적인 문제에 관해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없다.

유치부 때보다야 낫지만, 학교에 있는 시간 외에는 24시간 돌봐야 하다 보니 엄마들은 아플 수도 없다. 남편을 희귀 난치병으로 떠나보낸 뒤 홀로 자폐성 장애 1급인 외동딸 성은이(15)를 키우는 정인숙씨(58)는 심장이 좋지 않다. 성은이가 2박3일 수련회에 갔을 때 겨우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하루 더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급히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수련회에서 돌아오는 성은이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다음 날 정씨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실려 가는 순간에도 딸아이와 함께 119 구급차를 탔다. 성은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치료실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정도이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부를 수는 없다. 1∼3급 발달장애 진단을 받으면 급수별로 최대 월 120시간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시간도 너무 적고 전문성도 떨어진다고 엄마들은 입을 모은다.

 성인기-갈 곳이 없다

특수학교 전공과 2학년에 다니는 아들 이주민씨(21)를 둔 박민혜씨(50)는 아들이 졸업하는 내년 2월이 다가오는 게 불안하다. 자폐성 장애 1급인 주민씨는 보호작업장이나 직업재활시설에 가기에는 ‘기능’이 부족하다. 결국 주간보호센터에 가야 하는데, 그조차도 자리가 있어야 갈 수 있다. 머물 수 있는 시간은 2년.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1년 연장이 가능하다.

박씨는 방학 기간에 아들을 주간보호센터에 보냈다가 아들의 허벅지 안쪽에 멍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손에도 다른 친구에게 꼬집힌 자국이 있었다. 주간보호센터에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몰랐다. 아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세세히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간보호센터라도 보내지 않으면 일을 포기해야 한다. 보통 15명 단위인 주간보호센터는 사회복지사 1명이 5명을 담당한다. 예산이 적은 탓에 말 그대로 ‘보호’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증상이 심한 경우는 주간보호센터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온종일 집에 있다 보면 성인 자녀의 폭력 성향이 강해져, 말 그대로 ‘맞고 사는’ 부모도 적지 않다.

주간보호센터조차도 갈 수 없을 때는 부모가 24시간 돌볼 수밖에 없다. ‘시설’은 어떤 부모에게도 최후의 선택지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설의 경우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이 우선이라 들어가기 어렵다. 사설은 각종 사건 사고가 터진다. 부모들이 서류상 이혼을 하고서라도 아이를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에 보내려는 이유가 있다. “적어도 묶지는 않겠지. 폭행은 안 당하겠지”라는 절박함이다.

특수학급도 제대로 생기지 않았던 시절, 정부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딸 희원씨(32)를 전문대학까지 보낸 이정순씨(58)는 딸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을 타지 못했고, 목표로 했던 연금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자 딸아이가 갈 곳이 없었다. 겨우 연결된 장애인 직업학교를 1년 다니던 때의 일을 이씨는 잊지 못한다. “애가 새벽 5~6시에 일어나 학교에 가려고 하기에 경고를 세 번 하고, 그래도 떼를 써서 벌을 받아야 된다고 일주일 동안 학교를 못 가게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나중에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엄마, 나 그동안 갈 곳이 없어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나 좀 살려줘. 나 학교 가서 너무 행복해….’ 그래서 아무 소리 못하고 학교 보냈어요.”

희원씨는 결국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해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게 됐다. 32년 동안 아이를 키웠지만 딸아이가 자신이 내린 커피를 맛있어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해 보인다고 이씨는 말했다. 시댁에서 ‘우리 집안에 정신병자는 없다. 내다 버려라’는 말을 들으면서 딸아이를 키웠던 엄마는 “우리 아이들 돈 못 벌어도 좋고, 한 끼 두 끼 굶어도 좋아요. 아침에 눈떠서 갈 곳이 있고, 저녁에 돌아가 쉴 곳이 있는 그런 생활이 필요해요. 어차피 이 아이들은 최저의 생활을 하겠지만, 그래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엄마, 나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숨 좀 트이게 해줘.’ 우리 아이가 했던 그 말이 정답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아이의 미래다. 이들은 ‘죽을까, 살까’가 아니라 ‘혼자 죽을까, 아이와 같이 죽을까’를 고민한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아이와 함께 죽는 것’은 더 이상 끔찍한 뉴스도 아니고, 남의 일도 아니다. 자폐성 장애 1급인 둘째 아들 준석이(14)를 키우는 박미선씨(45)는 “저는 같이 가기로 결정했어요. 남편이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지금도 저는 아이를 데리고 자는데, 이 아이가 신처럼 믿고 있던 엄마가 없어지는 상실감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한다. 아들 민규(13)·민성(11)이 모두 자폐성 장애가 있는 성민주씨(45)는 “기독교를 믿지만 내가 가게 되면 얘네들 같이 끌어안고 가고 싶어요. 우리 애들 마음을 받아줄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엄마들은 “우리는 아이와 죽을 생각을 한 번씩은 다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발달장애 판정을 받고 난 뒤에는 창문을 제대로 못 열었다는 이도 있고, 차 타고 갈 때 운전대를 한강 쪽 방향으로 틀려다 백미러에 비친 아이 얼굴을 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는 이도 있다.

실제로 아이와 함께 죽으려고 시도했던 엄마도 만날 수 있었다. 자폐성 장애 1급인 딸아이를 키우는 ㄱ씨는 아이가 성인이 되고 갈 곳이 없자 절망감에 아이 목에 칼을 댄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애 눈동자가 너무 맑아서, 바라보는 눈동자가 너무 맑아서 못했어요. 엄마가 왜 그러는지 모르고 있으니까, 목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하는데도 가만히 있더라고요. 더 이상 힘을 줄 수가 없어서 그만뒀죠. 지금도 우리 아이는 ‘엄마가 내 목에다 칼을 댔어요’ 소리 잘 해요.” ㄱ씨는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아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엄마들은 말한다. 현준이를 키우는 신지영씨는 “이 아이는 어른이 돼도 아기 같을 텐데, 밥이라도 따뜻하게 먹여야 하는데…. 이렇게 치료를 열심히 하며 키워도 결국에는 장애인 시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암담하죠. 시설 가면 공장처럼 사람들 쭉 줄 세워놓고 누구는 비누칠하고 누구는 물 끼얹고 이런 식으로 목욕시킨다고 하는데, 그래도 내 아이를 인간답게 살게는 해야 하잖아요. 내가 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될 텐데. 그런 생각을 매 순간 하지 않을 수 없어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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