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에서는 한·미·일과 중국의 연쇄 회동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다시 6자회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회담 재개 방식이 과거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최대 주주인 미국이 교섭 과정에서 뒤로 빠지는 대신 한국이 전면에 나서고, 이를 일본이 보조하는 형태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연출·감독한 ‘시나리오’를, 한·일이 실행하는 국면이다.

이 같은 ‘한국 역할론’은 박근혜 대통령의 헤이그 첫 일정인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현지 시각 3월23일)에서부터 암시됐다.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 앞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린 것부터가 파격이었다. 게다가 박 대통령의 발언 중 깜짝 놀랄 만한 대목도 있었다. “앞으로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있고 북핵 능력 고도화에 대한 차단이 보장된다면 대화 재개와 관련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이 내용은 다음 날 있었던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한국이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해서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더욱이 최대 주주인 미국의 의사를 타진하거나 제안하는 형식이 아니라, “모색할 수 있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 발언에 뭔가 강한 자신감을 싣고 있었다.

ⓒ연합뉴스3월25일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6자회담 재개와 함께 ‘한국 역할론’이 부각됐다.

그게 뭘까? 6자회담에 대한 미국 측의 시각은 표면상 거의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월24일(현지 시각)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6자회담이 재개되려면 북한의 ‘비핵화 사전 조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측이 먼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중단과 핵·미사일 실험 유예조치(모라토리엄)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3월25일의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강경한 대북 발언을 계속했다. 특히 북한이 모든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방법으로 포기할 것’을 촉구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핵안보 정상회의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6자회담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이미 상당히 바뀌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지난 2월14일 중국을 방문한 존 케리 국무장관은 시진핑 주석, 왕이 외교부장,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 등을 차례로 만난 뒤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미·중 양국이 (비핵화 촉진과 6자회담 재개를 위해) 구체적인 조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일정한 방안들을 제시한 뒤 이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이 새로운 방안을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어떤 내용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사IN〉이 외교 소식통들을 통해 취재한 바에 따르면, 미국은 ‘비핵화 사전조치’를 엄격히 요구했던 종전의 태도에서 어느 정도 양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즉, 미국의 지금 입장은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가 ‘6자회담을 통해 비핵화(핵포기)를 추진하겠다’고 직접 선언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 역시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이다’라고 해오지 않았던가. 이 같은 김정은의 선언이 나오면 한·미·일 3국도 6자회담에서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 케리의 견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케리 장관과 중국 측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미국의 두 번째 옵션 때문이다. 즉 ‘회담 재개 후 북한이 또다시 회담장을 이탈할 경우 중국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복귀시키는 등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회담의 문턱을 낮춘 것은 환영하고 중국도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 그렇다고 무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북한에 대한 압력이 붕괴로 이어지거나 전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며 미국에 대한 경계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당시 나온 관련 기사들을 보면 이런 내용이 거두절미된 채,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대목만 보도되었다. 이처럼 일정 부분 진행되어온 미·중 간 대화는 지난 3월17~20일 방북한 우다웨이 6자회담 중국 측 수석대표가 조만간 글린 데이비스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만날 예정이라는 관측만 남긴 채 일단 마무리됐다.

그사이에 이번 헤이그 정상회담 일정이 잡혀 있었다. 내용적으로 보면 미국은 이미 6자회담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는 의사를 중국에 전달해둔 상태다. 그 연장선상에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얹혀 있다. 그러나 헤이그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북한에 비핵화 사전조치를 강조하는 강경 원칙론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오바마는 자신의 모호한 행보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의 모두 발언이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3국) 결속을 어떻게 심화할 수 있는지, 외교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협력하고, 공동 군사작전 그리고 미사일 방어 시스템(MD)을 통해 어떻게 더 심화시킬 수 있는지 논의할 것이다.”

ⓒ연합뉴스3월23일 박근혜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주석(오른쪽)이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 앞서 만났다.

오바마 언행의 핵심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것이다. 오바마의 4월 아시아 순방이 ‘아시아판 MD’와 직결돼 있다는 것은 이제 외교가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MD와 6자회담 양손에 쥔 미국의 딜레마

오바마의 4월 아시아 순방은 원래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한국과 일본 방문은 그 뒤 추가된 것에 불과하다. 오바마의 필리핀·말레이시아 방문 계획은 2012년 미국이 아시아판 MD 계획을 흘릴 때부터 거론돼왔다. 2012년 3월26일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는 “미국이 아시아와 중동에서 이란과 북한의 미사일을 막기 위해, 유럽과 같은 MD를 구축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다음 달, 북한은 평안북도 동창리에서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다. 이어서 8월23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이 일본 남부에 ‘X밴드 레이더 기지’ 하나를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X밴드 레이더 기지는 미국이 추구하는 아시아판 MD의 기반 시설이다. 아시아판 MD는 사드(THAAD:종말 단계의 고고도 방위 미사일) 시스템을 핵심 무기 체계로 하고 있다. 패트리엇3(P3)가 상대방 미사일이 떨어지는 최후 단계에서 영격하는 미사일(사정거리 20~35㎞)인 데 비해 사드는 상대 미사일이 대기권에 재돌입하는 단계(종말 단계)에, 성층권 위에서 영격하는 최첨단 미사일(영격 고도 150㎞, 사정거리 200㎞)이다. 이 시스템에 필수적인 게 바로 탐지거리 1000㎞에 이르는 X밴드 레이더 기지인 것이다.

미국은 2006년부터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시에 있는 항공자위대 샤리키 파견기지에 X밴드 레이더 기지를 설치, 운용해왔다. 쓰가루 시의 기지는 북한의 동해안 쪽, 즉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 반대편인 평안북도 동창리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또 다른 레이더 기지가 필요하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그래서 일본 남부, 즉 한국의 동해 쪽 해안에 레이더 기지를 추가 설치하자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이 레이더 기지는 북한 미사일뿐 아니라 중국의 탄도 미사일까지 견제하는 장치로 주장되었다.

더 나아가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에 기지 하나를 더 추가해 동아시아 전체를 커버하는 아시아판 MD망을 구축하는 계획까지 공공연하게 거론된다. 이미 지난해 2월22일의 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에 추가할 X밴드 레이더 기지의 최종 위치로 교토 부 교탄고(京丹後) 시 교가미사키(經岬)가 결정되었다. 이제 동남아의 추가 기지 한 군데만 확정하면 아시아판 MD 구상은 완료되는 것이다.

ⓒYTN 화면캡처겉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북한. 역시 6자회담이 절실하다.

현재 유력 후보는 필리핀이다. 2월4일자 〈뉴욕 타임스〉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 인터뷰에서 아키노는 2012년 스카보로초 섬을 둘러싼 필리핀 해군과 중국 해군의 대치 국면에서 미국이 중재해 필리핀 해군은 철수했으나 중국 해군은 그대로 남아 이 섬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며 전 세계에 도움을 호소했다. 아시아판 MD의 전초기지를 자임할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당연히 중국의 반발이 문제다. 유럽 MD 문제로 대치하고 있는 러시아도 가세할 수 있다. 더구나 6자회담과도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묘수풀이가 절실하다. 지난해 6월7~8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중국 해군이 동중국해(제1열도선)를 넘어 남중국해(제2열도선)까지 진출하는 것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 측에 미국 해군의 남중국해 통행을 방해하지 말 것과 아시아판 MD 구축을 양해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시사IN〉 제336호 ‘오바마·시진핑 ‘통화’였느냐’ 기사 참조) 그러면서도 아시아판 MD는 중국이 아닌 북한의 핵·미사일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중국이 아시아판 MD를 어떻게 보는가는 2012년 3월29일자 〈환구시보〉 사설에 잘 나와 있다. ‘항장무검 의재패공(項莊舞劍 意在沛公:항장이 검무를 추는 의도는 유방을 죽이는 데 있다).’ 중국이 바로 아시아판 MD의 목표라는 뜻이다. 그동안 중국은 이런 미국의 ‘항장무’를 멈추게 하기 위해 북한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면서 6자회담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아시아판 MD와 6자회담은 상극이다. 그러나 미국은 MD를 원하면서도 6자회담 역시 기피하기 어렵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더욱이 이미 6자회담을 통해 판을 바꾸기로 합의한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에 대한 공세 수위를 더욱 높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으로서도 6자회담이 필요할 수 있다. 동북아 이니셔티브를 되찾고, 북핵 문제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6자회담을 해야겠다’고 방향을 바꾸고 보니 시간이 없다. 미국으로서는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 이전에 6자회담 재개 문제를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 했던 것이다.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 이후 중·러가 아시아 MD 문제로 거세게 반발하게 되면 미국은 6자회담 문제를 꺼내지도 못하는 지경으로 몰릴 수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정전 60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더욱이 한 손으로 MD를 추진하면서 다른 손으로 6자회담을 추진하는 것도 이상하다. 따라서 미국은 운만 떼놓은 뒤 빠지고 누군가 교섭을 대신해줘야 한다. 현재로서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6자회담 참가국이자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나라는 최근 역사 문제로 상종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다. “지난 60일 동안 미국이 한·일 양국을 오가며 ‘설득 반 압력 반’으로 하나의 테이블에 앉히기까지는 이런 말 못할 절박함이 있었다”라고 워싱턴 소식에 밝은 인사가 전했다.

‘동아시아 외톨이’ 일본의 선택은?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각각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나. 일본부터 보자. 일본으로서도 6자회담은 ‘불감청 고소원(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몹시 바라던 바)’이다. 동아시아의 외톨이 신세에서 복귀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 제한적이긴 하나 역할이 아주 없지도 않다. 바로 북·일 간 채널을 통해서다. 3월3일 북·일 적십자회담(비공식 과장급 회담 병행)이 재개됐고, 국장급 회담 얘기도 나오는 게 바로 그런 맥락이다. 지난해에는 아베 총리가 핵·미사일 문제는 관심 없고 납치 문제에만 집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6자회담을 거론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한국의 역할이다. 미·중 양국뿐 아니라 러시아와도 대화할 수 있다. 북핵 문제라면 일본과의 대화도 피할 이유가 없다. 앞의 인사는 이런 이유로 “미국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간을 열어줬다”라고 풀이한다. ‘대화 재개와 관련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6자회담을 자신의 ‘통일대박론’과 연계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비핵화에 성의를 보이면 한국 역시 5·24 조치 해제 등 이명박 전 대통령 때와는 다르게 갈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 요인이 남는다. 먼저 중국이다. MD뿐 아니라, 한·미·일 공조 회복에 대해서도 긴장할 수 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 대학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대(對)중국 정책은 ‘통합하되, 헤지(hedge:위험을 분산시켜 관리)도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즉 중국과 G2 내지 ‘새로운 대국관계’로 협조체제를 구축(통합)하는 것이 기본 전략인 한편, 중국이 미국 통제권 밖으로 벗어날 때에 대비해서 다른 나라들과의 동맹 및 MD 구축 전략을 병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옛 소련에 대한 봉쇄 전략과 달리 중국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긴장의 발생을 최대한 억제하려고 한다. 중국의 의제인 6자회담을 한·미·일 3국 공조의 고리로 삼는다든지, 내용적으로 문턱을 낮추는 성의를 보인 것 역시 그 맥락이다. 무엇보다 사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만나도록 배려한 것이 이를 반영한다.

북한 역시 변수다. 우여곡절은 겪겠지만, 북한 역시 6자회담이 이뤄져야 올해 계획 중인 특구·개방구에 대한 투자 유치가 가능하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 역시 자신들의 원래 로드맵과 6자회담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미국의 강력한 압력 사이에서 곤혹스러울 것이다. 미국은 이미 일본에 대해 올해 말까지는 ‘동북아 안정’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일본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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