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대척점이란 말을 처음 배웠을 때다. 내가 서 있는 지구 정반대편의 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였던가 우루과이였던가? 나는 이름도 생소한 그곳 어디쯤에는 분명 나와 다를 바 없는 누군가가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큰 지구에 사는, 몇십 억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 어찌 나와 똑같은 이가 없을 수 있으랴. 그런 아이가 있다면 분명 대척점쯤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때의 나처럼 땟국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똑같이 엄마에게 때때로 꾸지람을 듣고, 똑같이 쓸모없는 공상으로 나날을 보내는 아이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만나서,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지나온 일들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공상을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게도 되었다. 바로 쌍둥이들이다. 함께 엄마 뱃속에서 자라고, 비슷한 외모와 성격으로, 오래 가까이 지켜본 이들만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쌍둥이 말이다. 지구 대척점이 아닌, 지금도 바로 내 곁에서 아웅거리고 헤헤거리는 쌍둥이야말로 정말 나와 똑같은 이가 아닌가. 나는 쌍둥이가 아님을 오래도록 아쉬워했다.

<쌍둥이는 너무 좋아> 염혜원 글·그림, 비룡소 펴냄
염혜원이 쓰고 그린 〈쌍둥이는 너무 좋아〉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 자신이 실제 쌍둥이였다니 어린 시절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알콩달콩한 일들이 많았을까. 책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생생할까. 그런데 같은 방, 같은 장난감, 같은 이불 등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이 쌍둥이에게도 갈등은 생겨난다. 성큼 자라 같은 이불을 더 이상 덮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서로 양보할 수 없어 아옹다옹 다투기에 이르는 이 쌍둥이들은 작아진 이불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결국 새 이불을 따로 만드는 수밖에. 이제 쌍둥이들은 노란색, 분홍색의 다른 이불을 갖게 된다. 물론 원래 덮었던 색동이불도 서로의 새로운 이불 한 귀퉁이를 저마다 차지하며.

실제 쌍둥이인 작가, 두 명의 화자 등장시켜

그림은 배경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인물과 인물에 직결된 대상들만을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인물의 표정과 동작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인물의 차이는 서로 다른 색감과 서로 다른 헝겊 인형으로 구분 지었다. 섬세한 외곽선으로 인물을 표현하며, 붓질이 남아 있는 색조가 부드러운 채색을 통해 반복과 변주를 거듭 짝을 이뤄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그림책의 이야기꾼, 곧 서술자는 아주 예외적으로 둘이다. 그리고 둘 다 스스로를 ‘나’라고 지칭한다. “난 팔을 뻗어 동생 손을 잡았어”와 “나도 언니 손을 꼭 잡았어”처럼 두 화자가 펼침면을 두고 각자 ‘나’로 스스로를 지칭하며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전혀 모순되지 않고 주고받는 화음처럼 어울려 긴 펼침면 전체를 중층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시간을 공간적으로, 공간을 시간적으로 변주해 보임으로써 글과 글, 그림과 그림의 대위법이 정교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고 내가 쌍둥이가 아님은 자명하다. 그러니 나는 여자를 알 수 없고, 쌍둥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같고 다름은 어쩌면 결국에는 상대적인 것이 아닐까. 더 큰 시야로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쌍둥이이며, 더 정밀한 눈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닐까.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이 차이 속의 동질성을, 동질성 속의 차이를 보여주고, 볼 수 있게 만드는 그림책들은 일단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갖춘 것은 아닐까.

기자명 김상욱 (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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