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20여만 명의 마녀를 처형한 끝에 18세기 들어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마녀사냥에 관한 이런 표준적 설명은 그것을 중세의 무지와 가톨릭 교부의 광기가 결합한 광란으로 정리한다. 색다른 설명으로는 인쇄술의 발달과 마녀판별법에 관한 다양한 읽을거리가 널리 퍼진 결과 마녀사냥이라는 대중적 광기가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기술(매체)의 발달이 대중의 온갖 열정과 결합하는 최근의 세태를 오늘과 너무 먼 과거에 외삽(外揷)했다는 비판을 듣기 알맞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는 이제까지 마녀사냥에 대해 읽었거나 알았던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마녀사냥은 중세의 비이성적 야만이나 가톨릭 교부가 저지른 죄악이 아니다. 우리 통념과 달리 중세는 마술에 관대했고 마녀를 우대했으며, 마녀사냥에는 신·구 기독교 전체가 가담했다. 계몽주의의 힘으로 마녀사냥이 종식되었다는 것도 허구다. 근대성의 설계자인 르네 데카르트와 토머스 홉스를 포함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오히려 마녀사냥에 불을 지른 장본인이며,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당대의 남성 엘리트는 이 문제에 불가지론을 선언했을 뿐 기소된 여성을 변론한 적이 없다. 
 

ⓒ이지영 그림

마녀사냥은 중세의 봉건제가 종료하고 근대로 넘어가는 자본주의의 이행기에 일어났다. 귀족으로 이루어진 지주와 부농이 농민들의 공유지를 빼앗는 인클로저(Enclosure)가 신호탄이었다. 12세기부터 시작되어 15세기 중반과 17세기 중반에 한 차례 완성된 인클로저는 농촌의 공동체를 와해시키면서 임금노동을 일반화하고 도시 빈민을 양산했다. 그러자 농민전쟁과 노동자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해결사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국가는 국내의 노동을 총괄하는 공식 담당자로서, 길들여지지 않거나 게으른 신체를 잘 훈육된 노동력으로 바꾸는 사회적 연금술을 과업으로 삼게 되는데, 그러자면 제일 먼저 손보아야 할 것이 있다.

“마법은 규칙화된 노동 과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에 대한 질적 개념에 근거했다. 신흥 기업가들이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다고 믿는, 다시 말해서 집 밖에 나가도 괜찮은 날도 있지만 그러면 안 되는 날이 있고, 결혼하기 좋은 날도 있지만 모든 활동을 삼가야 하는 날도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규칙적인 노동 형태를 어떻게 강제할 수 있었을까? 개인에게 특수한 힘(매력적인 외모, 투명인간이 되거나 육신을 떠나는 능력, 마법 주문으로 타인의 의지를 구속할 수 있는 힘 등)을 부여하는 우주라는 개념 또한 자본주의적인 노동 규율과 양립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녀사냥은 통제를 위한 국가의 ‘정치적 기획’

지은이는 마법과 자본주의적 노동 규율은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가 사회적 통제를 위해 마법에 대한 전투에 착수했다면서 마녀사냥을 ‘정치적 기획’이라고 부른다. 이 기획을 주저 없이 칭송한 이들 중에는 오늘날 과학적 합리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많은 명사들이 있음은 이미 말한 대로다. 계몽주의는 마녀사냥의 광풍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마치 자신들이 그것을 종료시킨 개선장군인 양 스스로를 추어올렸다.

한편 계속된 인클로저는 남성 임금노동자의 권력을 강화해준 반면,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린 16~17세기에 여성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입지를 상실했다. 국가는 날로 첨예해지는 사회갈등에 대응하고자 남성 노동자의 계급 적대 의식을 여성 적대로 전환시키기 위한 강한 여성 혐오 분위기 조성과 여성 차별 법안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갈무리 펴냄

을 쏟아냈고, 그것이 같은 시기에 시작된 마녀사냥의 토대를 닦았다. 마녀사냥은 산파와 같은 여성 고유의 직업을 남성 의사에게 넘기는 식으로 여성의 자급 수단을 박탈했으며, 마녀로 고소당한 피고는 반드시 다른 마녀를 고발해야만 했으므로 마녀사냥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여성끼리의 연대를 동강냈다. 두 세기 넘게 국가 테러리즘의 대상이 된 끝에 “여성성의 새로운 모형이 등장했으니, 바로 수동적이고, 순종적이고, 알뜰하고, 말이 적고, 항상 바삐 일하고, 순결한 이상적 여성이자 아내라는 모형이다”.

이 책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시초 축적을 한 16~17세기와 그 기간에 벌어진 마녀사냥 사이의 정합성을 증명함으로써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가 제시한 자본주의의 주요 개념을 반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여성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성이 어느 정도 형식적인 자유를 성취한 경우에마저 여성은 노예제와 다름없는 방식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또 베버는 자본주의적 부의 원천으로 부자의 근면과 절제를 내세웠으나 인클로저는 자본주의적 시초 축적이 곧 약탈과 폭력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캘리번과 마녀〉의 마지막 한 방은 마녀사냥이 유럽인의 아메리카 정복 사업에서 기원했다는 놀라운 결론에 있다. 남미에 정착한 스페인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공포를 불어넣고 집단적인 저항을 파괴하며, 공동체 전체를 침묵시키고 구성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마녀사냥을 전개했다. 유럽의 마녀사냥은, 식민지 행정가들이 신대륙에서 실험해보고 성과를 본 마녀사냥을 기득권층이 위기 상황을 맞은 유럽에 이식한 것이다. 이 주장은 그 적실성을 떠나 여성주의자이자 반세계화 운동가인 지은이의 면모를 드러내준다. 캘리번은 셰익스피어의 〈태풍〉에 나오는 원주민 반란자의 이름으로, 저임금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노동자(캘리번)나 부불노동(임금이 지급되는 않는 노동)을 감수하는 제1세계의 여성(마녀)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처지라는 점에서 동지가 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공공시장 개방과 사영화라는 게 드러난 지금, “어떤 생산양식이 다른 생산양식으로 대체되는 역사적 시기에 악마신앙이 등장한다”라는 지은이의 말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빨갱이’ 창조에 목숨을 거는 까닭을 밝혀준다. 또 극심한 양극화를 앓는 인도를 보면서 마녀사냥을 “국가 후원 강간”이라고 했던 지은이의 섬뜩한 표현을 떠올린다면, 요즘 인도에서 부쩍 자주 일어나는 집단 여성 강간이 왜 그토록 엄단되지 않고 방치되는지 알 수 있다. 지은이의 새 책 〈혁명의 영점〉(갈무리 펴냄)에서는 “이제 젠더를 순수하게 문화적인 현실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계급관계의 특수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캘리번과 마녀〉의 문제의식이 더욱 명료해지면서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공유재(토지·물·삼림 등)를 찾는 투쟁이 강조되고 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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