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 천관율 기자
  • 호수 338
  • 승인 2014.03.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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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편지에서 출발한 ‘노란봉투 프로젝트-우리가 만드는 기적 4만7000원’이 거대한 물결이 되고 있다. 국내 소셜 펀딩 사상 유례 없는 흐름이다. 피해자 구제에 그치지 말고 관련 법을 정비..
평범한 시민의 편지 한 통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모금을 시작한 지 19일 만에, 1명은 1만7500명이 되고, 4만7000원은 6억9000만원이 되었다. 국내 소셜 펀딩 사상 유례가 없는 추세다. 시민의 연대는 유명 가수와 정치인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노동자의 파업에 손해배상으로 응수하는 악행을 끊자며 손을 맞잡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한 사람의 편지에서 출발한 ‘노란봉투 프로젝트-우리가 만드는 기적 4만7000원’은 그렇게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2013년 12월,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되는 주부 배춘환씨는 <시사IN>에 보도된 한 기사를 보고 편집국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쌍용차 노조가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는 기사였다. “해고 노동자에게 47억원을 손해배상하라는 이 나라에서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해서,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입니다. 47억원… 뭐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들겨봤더니 4만7000원씩 10만명이면 되더라고요.” 편지에는 현금 4만7000원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사연이 2014년 신년호에 실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발성 미담’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본 독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배씨를 따라 4만7000원을 넣은 편지, 함께할 방법을 알려달라는 메일과 SNS 메시지, 당장 모금 계좌번호를 내놓으라는 독촉 전화가 이어졌다. 무작정 돈부터 입금하는 독자도 있었다. 모금 추진 독자위원회까지 순식간에 꾸려졌다. 독자들이 단발성 미담을 물결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문가가 보기엔 ‘안 될 모금’이었는데…

현행법상 언론사는 일정액이 넘는 모금을 주관할 수 없다. 1월4일 첫 모임을 가진 <시사IN> 독자위원회는 공익기부 전문재단인 아름다운재단(이하 재단)에 모금을 의뢰하자는 대안을 냈다.

재단은 고민에 빠졌다. 이 프로젝트는 재단의 기존 모금 사례들과 여러 가지로 달랐다. 가족이나 아동 문제처럼 직관적이지 않고 취지 설명이 어려웠다. 노동 관련 모금이라 대기업과 같은 ‘큰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방송 노출도 쉽지 않았다. 모금 기획자의 관점에서 보면 일이 안 될 요소만 잔뜩 들어가 있는, 도대체 앞이 잘 안 보이는 기획이었다.

“하겠습니다.” 1월7일, 재단이 모금 추진을 결정했다. 도박이었다. 재단은 쌍용차 노동자뿐만 아니라, 손배에 짓눌린 노동자 가족의 생계비·의료비 긴급 지원을 목적으로 정했다. ‘노동’이나 ‘쌍용차’와 같은 무거운 주제보다 ‘사람’과 ‘가족’에 주목하기로 했다.

<시사IN>도 바쁘게 돌아갔다. 임직원과 노동조합이 내부 모금으로 470만원을 모았다. 편집국에서는 손배 문제를 다루는 기획안이 쏟아졌다. 한 기자는 “그동안 손배는 ‘누가 죽어야 쓸 수 있는 아이템’이었는데, 배춘환씨의 편지 덕분에 이제는 누가 죽지 않고도 기사를 쓸 계기가 생겼다”라고 말했다. <시사IN>은 제331호 커버스토리를 비롯해 손배 문제를 연이어 다뤘다.

행정 절차를 거쳐 모금 사이트가 공식 오픈한 것은 2월10일이었다. 2월18일, 모금의 분기점이 된 가수 이효리씨의 동참 편지가 공개된다. 편지에서 그녀는 “작은 돈이라 부끄럽지만, 한 아이 엄마의 4만7000원이 제게 불씨가 됐듯 제 4만7000원이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리길 바랍니다”라고 썼다. ‘이효리 효과’는 모금 추이를 눈에 띄게 끌어올렸다. 편지가 공개된 2월18일과 다음 날인 19일에는 하루에 2000명이 넘는 기부자와 1억원이 넘는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위쪽 그림). 2월25일, 모금을 시작하고 겨우 16일 만에 1차 목표 4억7000만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재단에서 모금 관련 업무를 담당한 서경원 모금팀장은 “이효리씨의 편지 이전부터도 저희는 모금 페이스가 빨라서 놀랐거든요. 하루에 1000만원이 넘게 들어온 날도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대단히 뜨거운 열기다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닥 흐름’이 애초부터 달랐다는 얘기다. 베테랑 모금 기획자도 반신반의하며 추진했던 ‘감정이입 어렵고 홍보가 곤란한’ 이 프로젝트는, 검증된 아이템이라는 가족·아동 관련 모금보다도 오히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흐름이 이효리씨의 편지를 만나 널리 알려지자,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손배·가압류에 시달리던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2003년이다. 손배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목숨을 잃은 노동자의 이야기가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천문학적인 손배 소송, 기본 생활마저 불가능하게 만드는 통장 가압류, 국제 관례와는 달리 기업 편향적인 현행법과 법원 판례 등을 보며, 영화 <변호인>의 대사처럼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는 정서가 조용히 쌓여갔다.

자기 돈 내면서 미안해하고 감사하는 사람들

‘진보 대 보수’라거나 ‘노동 대 자본’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공정을 혐오하고 희생자에 감정이입하는 대중의 본능적 감수성을 건드렸다. 한 기부자는 재단의 기부 사이트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아들이 어렵게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6개월 계약직이어서 구조조정 말이 나올 때마다 힘들어합니다. 뉴스 볼 때마다 분노하고 여러분은 얼마나 힘드실지 가슴 한쪽이 쓰리고 아팠습니다. 4만7000원 작은 돈이지만 누군가의 아들의 학자금 한 달치 이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냅니다.”

분노가 유일한 동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된 동력은 다른 데 있었다. “정말 특이한 게, 기부하시는 분들이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말을 정말 많이 하세요. 자기 돈을 내면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분들을 이렇게나 많이 본 경험은 늘 이 일을 하는 저희도 처음입니다.” 서경원 팀장의 말이다.

기부 사이트에는 이런 댓글들이 쌓여갔다. “시청 앞을 지나던 어느 비 오는 추운 겨울날, 모금함을 지키고 계셨던 분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그날 그냥 지나쳤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시사IN>의 창간 정기구독자이자, 손배 소송과 가압류 등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변호사입니다. 늦은 점심을 혼자 먹으면서 <시사IN>의 글을 통해 그분의 편지를 접했을 때 눈가가 뜨거워지며, 변호사인 게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여기 저와 집사람, 그리고 더 인간적인 얼굴을 한 세상에서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 아이들 2명의 바람을 담아.”

돈을 내는 사람이 더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기부라니, 정체가 뭘까?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대번에 “‘와락’ 때와 똑같아요”라며 반가워했다. 그녀는 쌍용차 노동자의 잇따른 자살 행렬을 멈추기 위해 심리치유센터 ‘와락’의 창설을 주도했다.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고 어마어마한 손배 소송에 짓눌리는 걸 계속 보는데 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화가 나면서도 무기력하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기력하니까 미안한 거예요. 그게 계속 짓누르던 차에 개인도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니까 감사한 거죠. 분노, 무력감, 미안함, 감사함이 함께 가요.”

미안함과 무기력함은 일반 시민만 느끼는 정서가 아니었다. 이효리씨의 편지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너무 큰 액수라서, 또는 내 일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모른 척 등 돌리던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무력감을 뛰어넘으려면 문제를 잘게 쪼개어, 개인이 참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로 만들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정혜신씨는 4만7000원이라는 1인당 기부 액수와 4억7000만원이라는 1차 모금 목표 설정이 좋은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4만7000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결심하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돈이잖아요. 한 번에 47억원까지 가는 게 아니라 4억7000만원을 1차 목표로 낸 것도 좋은 방법이었어요.”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2009년 8월5일 쌍용차 노조원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공장에 경찰 병력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였다. 사람들은 “술을 하루 참고” “외식을 건너뛰고” “데이트 한 번 생략하고” “십일조 대신” “까짓 두 달 에센스 없이 살겠다”라며 4만7000원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댓글로 달아 다른 이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한 기부자는 이렇게 썼다. “명목상 그분들을 위한 일이지만, 하고 나니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이런 멋진 일에 동참하는 자체가 삶에 에너지를 준다. 기부 금액 대비 기분 상승 효율로 따지면 최고의 기부다.”

최초 제안자인 배춘환씨는 이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무력감에 짓눌리던(“이 나라에서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해서”) 그녀는, 자신이 통제 가능한 범위로 목표를 쪼갰다(“47억원… 뭐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들겨봤더니 4만7000원씩 10만명이면 되더라고요”). 그러고는, 다른 이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9만9999명이 계시길 희망할 뿐입니다”).

<시사IN>은 소셜 댓글 서비스 회사 시지온과 네트워크 분석 전문기업 트리움의 도움을 받아, 기부자들이 남긴 댓글을 수집해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가 아래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기부자들이 품은 정서를 컴퓨터로 분석해 종합한 결과물이다.

기부자들은 이번 모금을 노동 문제나 정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보고 ‘마음’을 모았다.
기부자들은 이번 모금을 노동 문제나 정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보고 ‘마음’을 모았다.

역시 ‘이효리’는 강력한 방아쇠였다. 그녀가 쓴 ‘편지’와 그 소식을 전한 ‘기사’ ‘덕분’에 사람들은 4만7000원 프로젝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초록색).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고통’에 대해 알고 있었다. ‘손배 가압류’ ‘판결’이 얼마나 ‘잔인’한지도 알았다. 그렇지만 개인이 해결할 수 없어 ‘답답’하던 차였다(황토색).

이효리의 편지를 계기로 4만7000원 모금 프로젝트를 알게 된 기부자들은, 이를 노동 문제나 정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보고 ‘따뜻’한 ‘마음’을 모아 감정이입했다. 이들은 그렇게 ‘희망’을 발견했다(노란색). 기획 단계부터 재단이 고민하던 방향으로 받아들여준 셈이다. 그 결과물이 오른쪽 푸른색 블록이다. 기꺼이 ‘동참’하고, ‘뿌듯’해하며, ‘참여’로부터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 이번 모금이 큰 호응을 얻는 이유를 이 그림이 압축해 보여준다.

이 모금이 진정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돈을 모아 손배 피해자들을 긴급 구제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 물결을 타고 관련 법을 정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래서 2차 모금을 열 때 재단은 ‘법률 개선활동 지원’이라는 사용처를 추가했다.

관련 법 정비의 열쇠 쥔 국회의원들도 동참

열쇠를 쥔 국회의원들의 동참도 이어졌다. 대선 주자였던 민주당 문재인 의원은 재단에 편지를 보내 “그동안 노동자들이 짊어져야 했던 이 짐들을 시민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원혜영·전순옥·은수미·장하나 의원도 참여했다. 손배 문제를 정치권 의제로 끌어올리는 단계까지 진입한 것이다.

2월28일 현재 기부자는 1만7500명, 모금액은 6억9000만원을 돌파했다. 2차 모금에 들어와서도 추세가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만드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4만7000원 프로젝트는 어느새 ‘우리가 만든 기적’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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