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1940년대의 만주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연상시킬 만큼 ‘골드러시’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이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유랑극단들도 만주로 달려갔다. 유랑극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는데, 일본 대중문화사 연구 결과를 보면 이들이 일본인에게도 인기를 얻는 모습을 보고 ‘예능인으로서의 조선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최근에는 조선인의 애환을 달래던 이들의 노래가 일본 엔카의 원류가 되었는지 여부를 따지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흥미롭게도 만주(지금의 동북 3성) 지역은 한류가 처음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한류의 원조 격인 만주 유랑극단의 역사를 살피려는 이유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김영일 작사·김교성 작곡, 1941)이라는 노래다. 반세기를 넘어 70년이 지났지만 KBS 〈가요무대〉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불린 곡 중 하나이니 그야말로 ‘흘러간’이 아닌, ‘흘러온’ 옛 노래이다. 내가 이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처음에는 식물학적(?) 이유에서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에서처럼 찔레꽃 색깔은 흰데 어째서 붉게 피느냐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가장 큰 레코드사였던 오케레코드 산하 조선악극단(위)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여덟 차례 만주 순회공연을 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찔레꽃 노래비’(한림읍 명월리)를 만나게 되었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이 노래의 3절 가사를 알게 되었다.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그렇다. 이 노래는 북간도에서 ‘남쪽 나라 내 고향’인 제주도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알고 보니 백난아의 고향은 제주도인데 아주 어린 시절에 만주로 이주했다가 다시 청진으로 옮겨가 거기서 자랐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제주도에서 북간도까지다. 한반도 남부에 제한되어 있던 공간적 지평이 갑자기 확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1940년 11월에 나온 백난아의 첫 음반에 수록된 ‘오동동 극단’(처녀림 작사·무적인 작곡)의 가사를 살펴보자. 이 노래의 화자는 열일곱 살 오동나무 가극단 아가씨로, “남만주다 북만주”(1절), “차무쓰다 안동현”(2절)의 “만주천지 눈천지”(3절)를 몇 해 동안 떠돌고 있다. 적어도 1930년대 중반부터는 만주 일대를 누비고 다니는 유랑극단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2월에 나온 저 유명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김용호 작사·이시우 작곡)이 만주 순회공연 중 접하게 된 이야기에서 나왔으며, 지금 중국의 투먼에는 그 사연을 들었던 공연단의 숙소가 복원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가장 큰 레코드사였던 오케레코드 산하 조선악극단은 1935년 2월 하순부터 3월 하순까지 한 달에 걸쳐 이난영·임방울·고복수 등이 출연하는 첫 순회공연 〈오케 예술의 밤〉을 가졌는데, 일정 마지막에 안동과 봉천을 들렀다(안동은 지금의 단둥이며 봉천은 선양이다). 오케레코드는 1940년 8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모두 여덟 차례 만주 순회공연을 가졌다. 공연이 열린 곳으로 모두 27개 도시의 이름이 보인다. 그중 세 차례 이상 들른 곳은 봉천(선양·10회), 안동(단둥·8), 신경(신징·7), 도문(투먼·7), 하얼빈(6), 목단강(무단장·6), 길림(지린·5), 용정(룽징·5), 대련(다롄·4), 가목사(자무쓰·4), 임구(린커우·3), 혼춘(훈춘·3) 등으로 나타난다.

‘찔레꽃’을 부른 가수 백난아(왼쪽)와 ‘타향살이’를 불러 인기를 끌었던 가수 고복수(오른쪽).
서울에서 온 당대의 최일류 공연단이 그만큼 순회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관객)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보다 작은 군소 공연단은 더 작은 마을까지 다녔을 것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위로는 서쪽 치치하얼에서 동쪽 자무쓰까지, 아래로는 서쪽 다롄에서 동쪽 훈춘까지 걸쳐 있다. 지금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의 주요 지역을 거의 포괄한다. 대강 세로로 600~ 1200㎞, 가로로는 800~1000㎞에 이르는 영역이다. 한반도보다 훨씬 넓다. 당시 동포들이 살던 마을은 그보다 더 넓은 범위에 걸쳐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다음 1932년 3월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사실상 통치했다. 일제의 만주국 경영시책으로 이주가 장려되었다. 1934년 당시 만주국 인구의 남녀 성비가 122대100으로 추정된다니 실제로 이주자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15 당시 만주의 조선인은 216만명이 넘었는데 그중 100만명 이상은 만주국 건국을 전후해 이주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주 동포들을 타깃으로 하는 공연 시장도 형성되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는 유랑극단이 많았음은 이를 소재로 하는 대중가요가 10여 곡이나 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유랑극단’(박영호 작사/전기현 작곡/백년설 노래 1939. 1), ‘제2 유랑극단’(이고범/전기현/채규엽 1939. 9), ‘제3 유랑극단’(유도순/전기현/백년설 1940. 6) 하는 식으로 이어진 경우를 보면 그만큼 인기도 많았던 것 같다.

고생하는 동포들, 유랑극단으로 향수 달래

‘청노새 극장’(이가실/한상기/김영춘 1942. 2)의 노랫말에는 “저 언덕 넘어가면 우리 동포 개척지”라는 내용이 있다. ‘흑룡강을 넘는다’고도 나온다. 아시다시피 헤이룽장(흑룡강)은 러시아어로는 아무르강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다. 당시에도 소련·만주 국경이었다. 헤이룽장의 본류를 넘지는 못했겠지만 아마도 지류 정도는 넘었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당시 동포들의 활동 범위가 북쪽으로도 엄청나게 올라갔다는 걸 알 수 있다.

백년설의 노래로 지금도 애창되는 ‘복지만리’와 ‘대지의 항구’(남해림 작사·이재호 작곡)는 영화 〈복지만리〉(전창근 감독, 1941. 3)의 주제가다. 이 영화는 만주 이민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복지만리’ 2절에는 “백마를 달리던 고구려 쌈터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래서 이 노래를 민족의식, 심지어 독립군과 관련 지으려는 발상이 나온다. 하지만 중·일 전쟁하에서 고구려를 불러낸 의도는 뻔하지 않을까? 고구려가 수·당과 싸웠듯이 지나(중국)와 싸우자는 것은 아니었을까? 게다가 3절 가사는 일본어로 되어 있다. 이런 내용이다. “노래를 부르자 뛰노는 흑마여/ 가슴에 고동치는 정열의 기운/ 하늘에선 연보랏빛 눈이 날리고/ 달려가자 밝아오는 광야의 저편으로.”

유랑극단은 고향을 떠나와 타국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위로하고 향수를 달래주었다. 그래서 ‘정든 땅’(백년설/조명암/이봉룡 1943. 3)은 “고향이 따로 있나 정 들면 고향이지”(1절), “낯선 땅도 살면 고향”(3절)이라 노래한다. 그러나 일제는 그 정도의 역할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1942년 7월 조선연극문화협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단체 산하로 들어간 ‘이동극단’들은 “국민의식의 앙양과 일반 문화 수준의 향상”을 꾀하기 위해 ‘이동천막(조명암/이촌인/백년설 1943. 9)’의 가사대로  “천막 치고 군악 치는 연예 봉사대” 노릇밖에 할 수 없었다. 이처럼 만주에 맺힌 유랑극단의 한을 반세기 뒤 후대 연예인들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풀어주고 있는 셈이다. 우연하게도 한류는 이 동북 3성(만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자명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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