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심이 쓴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시사IN북)는 1979년 10월26일에 벌어진 박정희 암살 사건을 재조명한다. 지은이의 10·26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단호하다. 10·26은 유신의 심장이자 종신 대통령을 꿈꾸었던 박정희를 제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되살리고자 했던 김재규의 의거다.

박정희는 육사 2기 동기생이자 고향 후배나 다름없는 김재규를 아껴서 보안사령관과 3군단장을 역임하게 하고, 유정회 국회의원을 거쳐 마지막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중정)를 맡겼다. 개인의 정리로 보자면 김재규는 이처럼 자신의 출세가도를 이끌어준 박정희를 저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의거를 실행했을 때는 이미 2년10개월째 중앙정보부 부장 직분을 수행할 때다. 유신의 일부인 그가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니 일종의 자기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지영 그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고 우발적이지도 않았다. 김재규가 3년8개월 동안의 보안사령관직을 마치고 제3군단장을 하던 1972년 10월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유신헌법을 두세 번 자세히 읽어본 김재규는 그것이 민주헌법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내 목숨과 유신 독재를 바꿔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사례로 1974년 9월14일 중정 차장을 하다가 건설부 장관이 되었을 때, 임명장을 받으러 가면서 총을 숨겨 가지고 갔으나 차마 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장이 된 1976년 12월부터는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한국에 비판적인 외신을 번역해 넣거나 직언하는 방법으로 정국 유화책을 건의했으나 박정희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란도 혁명도 아닌…

10·26 직후 계엄사령부의 중핵인 합동수사본부를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사건에 조선왕조 시대에나 가능한 ‘시해’니 ‘대역죄’니 하는 죄명을 뒤집어씌우면서 내란음모죄를 적용했다. 이에 김재규는 자신의 의거를 혁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는데, 김재규의 거사를 내란이라고 하기에는 일반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는 점이 많다. 김재규로부터 대통령을 처치하겠으니 대통령 경호원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부하 다섯 명은 사건 당일 그것도 저격 30분 전에 명령을 전달받았으며, 사태 수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대통령이 주흥을 즐기고 있는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자 부장의 명령에 따라 경호원을 제압하고 나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이래서는 내란이 될 리 없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문영심 지음시사IN북 펴냄

혁명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10·26은 보안사령관직과 중앙정보부장까지 두루 지낸 전직 장성이 일으켰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허술했다. 사건 직후 그의 동선이나 수습 처리를 보면, 이건 대체 오랫동안 유신을 끝장내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해온 사람의 거사가 아니다. 최근에 나온 한홍구의 〈유신〉(한겨레출판)은 “이조시대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다”라고 진술한 김재규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인용하면서, 오랜 기간 정보기관을 거느리며 보안의 중요성과 첩보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혼자 구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핵심은 김재규가 유신 체제와 박정희를 동일시했으며, 박정희는 자국민을 300만명이나 희생시킨 폴 포트가 되면 되었지 결코 자의로건 타의로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는 데 있다. 박정희 사후 어느 국민이나 정치인도 유신 체제를 수호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 체제가 급격히 허물어져간 것을 보면 유신과 박정희가 한 몸이라는 김재규의 인식은 한 치도 틀림이 없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박정희를 제거하기만 하면 18년 동안 박정희 1인 통치에 신음해온 국민이 모두 호응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조직을 만든다거나 동지를 규합하는 등의 성가신 내란음모를 꾸미거나 혁명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역사는 그의 믿음과 다르게 흘러갔다. 거사 직후 전두환과 신군부는 ‘5·16 교본’이라는 연구 사례까지 급조해 회람하면서 대통령 유고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고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헌법과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나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 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하게 되어 있으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거사 직후 무리한 계엄령을 이용해 정권 찬탈의 시나리오를 짰다. 계엄 상황에서는 정보부·검찰·경찰 같은 정보 수사기관이 모두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의 통제를 받아야 했기에 신군부는 계엄령을 유지하면서 정국이 요동치기를 기다렸다.

김재규의 총과 안중근의 총

내란죄가 아닌 일반 살인죄로 재판을 했다고 하더라도 김재규의 운명은 당시의 시국으로 보아 사형을 면하기 힘들었다. 다만 적법한 절차에 따른 공개 재판이 이루어졌다면 김재규의 뜻대로 유신 체제의 허구가 밝혀지고 거사 동기도 명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이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의 허구성이 법정에서 논의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 재판이 얼마나 위법투성이이며 졸속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에 자세히 담겨 있는데, 지은이가 이만한 수준의 평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신군부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사법 정의를 위해 싸웠던 강신옥·안동일·고 태윤기 같은 변호사가 많은 재판 기록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10·26 직후 양 김(김영삼·김대중)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공치사를 앞세우기 위해 김재규의 거사를 폄하했고, 이후에는 어느 정치인도 선거 때 표가 달아날까 봐 김재규의 명예 회복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오늘도 말깨나 하고 생각 좀 한다는 사람들은 ‘김재규의 어설픈 총질로 민중봉기에 의한 유신정권 타도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푸념을 하며 김재규를 원망한다. 하지만 한홍구의 우려처럼 유신 시대가 부활할지도 모르는 지금 대중에게 자신이 왜 박정희를 쏘았는지를 이야기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의 재평가를 위한 준비를 시작할 때다. “유신 독재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흘러온 결과라면 안중근이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인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과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쏜 날이 같은 날이라는 것이 어떻게 우연일 수만 있겠는가?”(강신옥)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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