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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물단지가 선물이 되네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김정후 지음/돌베개 펴냄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webmaster@sisain.co.kr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제3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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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부터 소련의 붕괴까지를 ‘단기 20세기’로 정의하면서도 20세기가 매우 다양하고 극단적인 변화가 추동되었던 시대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소련 제국의 몰락을 ‘역사의 종말’과 동일시한 우파 지식인들에 반박하기 위해 20세기의 3분기는 “인류의 압도적 다수가 먹을 것을 재배하고 가축을 돌보며 살아간 긴 시대를 끝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석기시대의 농업 발명으로 시작된 인류사의 7000~8000년을 끝냈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좀 더 의미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인류의 정주 형태라는 측면에서 보면 20세기는 세계 인류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세기였다는 점을 함께 주목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도시의 역사이며, 도시의 역사는 곧 문명의 역사였다. 통계를 보면 현재 70억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며 앞으로 30년 후 세계 인구는 80억, 그 가운데 60억명이 도시 거주자가 되리라 예측한다. 그런데 무엇이든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은 이미 전 국민의 8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한다.

유럽의 ‘산업유산 재활용’ 집중 연구

건축가이자 도시사회학자인 김정후 선생은 영국에 거주하면서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를 경험한 서구 유럽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이들이 옛 건물들, 특히 근대화의 전형적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산업유산을 어떻게 재활용했는지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을 쓰면서 ‘누구를 위한 책인가’를 고민했다”라고 밝혔다. 그 이유는 산업유산의 재활용이 몇몇 전문가들만의 몫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동참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소개한 14편의 산업유산 재활용 사례들은 단순히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런 일들도 가능하다는 선망이나 미담 따위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하다고 말하며 가능하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포토</font></div>한국 사회는 뉴타운(위)처럼 철거하고 새로 짓는 데 익숙해졌다.  
ⓒ시사IN 포토
한국 사회는 뉴타운(위)처럼 철거하고 새로 짓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 근대화의 양대 축을 이루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나름 성공한 개발도상국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속도의 문제였을까? 민주화는 후퇴하고 있으며, 근대화가 만들어낸 도시 건축물들은 어느 순간 도시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으로, 개발 속도에 밀려 제 기능을 상실하고, 주변 환경과도 어우러질 수 없는 애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모두 철거해버리고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 것이다. 우리는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뉴타운’에 집중했던 경험이 있다. 그 결과 용산참사와 4대강의 비극을 경험했다. 이것은 잘못된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이 만든 실패이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빚어낸 실패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는 <희망의 조건>에서 “세계가 공적 공간을 가지려면, 세계는 한 세대를 위해서만 건립되어서도 안 되고 살아 있는 자들만을 위해 계획되어서도 안 된다. 세계는 죽을 운명인 인간들의 수명을 초월한다. 이러한 지상의 잠재적 불멸성으로의 초월이 없다면 또 엄격히 말하자면 어떤 공동 세계나 공론 영역도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세대, 이 나라의 국토와 자연을 후손들에게 잠시 빌려 쓰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의미 있는 근대 건축물을 손쉽게 파괴하고, 그보다 오래된 과거를 현대에 복원하겠다는 근시안적 식민주의와 새로운 형태의 개발 담론을 극복하자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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