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만 대. 전 세계 악기 소비 시장의 30%를 차지하는 미국에서 2010년 한 해 동안 팔린 기타 대수이다(어쿠스틱·전자 기타 총합, ‘2011 NAMM 글로벌 리포트’ 참조). 그 수치를 토대로 어림짐작한 전 세계 기타 판매량은 대략 1억 대에 이른다. 기타 줄은 6개, 6억 개의 기타 줄이 튕겨지는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127명. 2007년 공장에서 기타를 만들다가 정리해고된 콜트콜텍 노동자 수다. 연간 수십억원 흑자를 내던 회사는 ‘긴급한 경영상의 필요성’을 이유로 국내 공장 문을 모두 닫았다. 대신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새 기타 공장을 차리고 인건비가 저렴한 현지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순식간에 삶의 수단이 사라진 국내 해고자 가운데 어떤 이는 밥을 굶고 어떤 이는 15만㎾ 송전탑에 오르고 어떤 이는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더 싸게, 더 많이 기타가 만들어질 수 있는 이 세상은 참 슬픈 곳이다.

ⓒ시사IN 조남진12월11일 서울 논현동 연습실에서 만난 신대철씨는 “나도 비정규직 음악 노동자”라고 말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 못지않게 기타를 삶의 수단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 열 살 무렵 아버지에게 기타를 배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훗날 임재범, 서태지, 김종서 등이 거쳐간 록그룹 시나위를 만들었다. 1986년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히트시킨 1집 앨범 〈헤비메탈 시나위(Heavy Metal Sinawe)〉로 데뷔해 지난 7월 10집 〈미러뷰(Mirrorview)〉를 내기까지 30여 년간 무대에 올라 기타를 쳤다. 신중현의 아들, 시나위 리더, 전설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음악가 신대철씨(46) 이야기다.

최고의 기타리스트와 기타를 만들던 해고 노동자들의 교집합은 우연한 기회에 생겼다. 지난 11월 신씨는 콜텍문화재단이 마련한 기타 콘서트에 참가했다. 무대에 오르기 며칠 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연 소식을 게시한 신씨는 숱한 페친(페이스북 친구)들에게 걱정스러운 질문을 받았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시나요?” 기타 노동자들을 해고한 회사가 만든 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콘서트 무대에 왜 오르느냐는 항의였다.

신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했다. 사실 콜트콜텍에 관한 일은 잘 모르고 있었다고, 공연을 며칠 앞둔 지금 취소하기는 어렵다고 머리 숙였다. 대신 약속했다. “기회가 된다면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를 위한 후원 행사를 마련하겠습니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약소하나마 작은 성의를 표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12월15일 신씨는 김목경, 최이철, 한상원 등 다른 기타리스트와 함께 ‘기타 레전드, 기타 노동자를 만나다’라는 이름의 콜트콜텍 노동자 후원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공연 나흘 전, 서울 논현동 연습실에서 만난 신씨 입에서 나온 공연 이유는 단순했다. “같은 노동자니까요.” 신씨는 스스로를 연주하는 노동자, 기타 치는 노동자로 표현했다. 계약직·임시직·비정규직에다 영원한 ‘을’이기도 하단다. 하지만 그 노동, 기타를 치는 것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공감하고 조금이라도 공헌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연을 결정했다고 했다.

“과거가 되돌아오는 광경을 보고 있네요”

“혼자 앉아 도 닦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하듯, 신씨는 사람들 앞에 잘 나서는 사람이 아니다. 어쩌다 MBC 〈나는 가수다〉, KBS 〈탑밴드〉 등에 고정 출연하고 몇몇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갔지만 그 경험을 얘기할 때조차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는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을 쳤을 때 쏟아지는 가십 연예 기사들이 아직 어색하고 얼떨떨하다.

ⓒ시사IN 이명익2월1일 법원 집행관이 콜트 악기공장에 대해 강제 집행을 하자 공장 밖으로 끌려나온 해고 노동자들이 항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을 감추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등 떠밀려 시작했다는 페이스북 ‘담벼락’에 신씨는 꽤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적어 올린다. “술 먹은 다음 날 해장국 먹을 때 들깨를 너무 많이 넣으면… 술이 ‘들깨’”와 같은 ‘창작’ 유머 글들 사이에 간간이 일본 방사능 오염에 관한 기사를 공유하고, 우편향 교과서 저자들의 발언에 분노하며, 국정원의 행태를 비꼬는 글들이 발견된다. “자기 목소리를 자기 음악에 담는 음악가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쓴 글들이다. 최근에는 김익중 교수의 〈한국 탈핵〉 등 원자력 관련 책들을 읽고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봤다. “원전 이거는 만들어선 안 되는 물건”이라는 게 공부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런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6년부터 음악 활동을 해온 신씨에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가사를 써서 무슨 위원회에 보내면 ‘금지’ 딱지가 붙거나 빨간 줄로 좍좍 고쳐져 돌아오던, 사전 심의제도가 살아 있던 ‘문화 테러 시대’를 직접 겪었다. “누구나 자기가 말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 이걸 한동안 누리는가 싶더니 언제부터인가 악몽 같은 과거가 되돌아오는 광경을 보고 있네요.” 스스로 자꾸 자기 검열을 하는 시대, “그래서 느는 건 은유와 비유뿐”이라는 현실에 대해 신씨는 “슬프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주관이 뚜렷하지만 편을 가르는 사람이 아니다. 인터뷰 내내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게 꼭 좋다는 뜻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와 같은 말머리, 말꼬리를 자주 달았다. 음악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후배들, 공급 과잉이 돼버린 음악 일자리 시장에 대해 얘기할 때도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라고 강조했다. 다만 그 ‘선택’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요즘의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른 채 사회와 부모가 원하는 프레임에만 맞춰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 그들을 보며 우리 교육을 많이 걱정한다.

쉰 살을 바라보는 신대철씨는 여전히 음악으로 행복하고, 음악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처럼 슬픈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뒤집어엎을 정도의 힘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들 곁에서 기타를 치기로 선택했다. 시나위 10집의 타이틀곡 ‘슬픔의 이유’는 노래한다. “아픔의 이유를 말해봐/ 슬픔의 이유를 말해봐/ 목이 터져나게 외쳐봐/ 서로 손을 잡을 수 있게/ 넌 혼자가 아냐.”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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