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했을 때 민주당 의원들은 꽤 고민했던 모양이다. 국정원과 군의 대선 개입 건에 대해 안면몰수하고 나올 게 뻔한데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민주당 의원석으로 와서 악수를 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떤 의원은 그래도 대통령인데 일어나서 맞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고, 어떤 의원은 앉은 채로 한 손으로 악수만 하겠다고 했다. 고심하기 구차해 아예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않은 의원도 있었다. 나중에 한 의원은 차라리 당론으로 정할 걸 그랬다는 얘기도 했다. 국회의원씩이나 된 사람들이 이런 사소한 일에 에너지를 쏟는 걸 보며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는 물론 전 세계의 유명인이란 유명인은 죄다 만나고 다니면서도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듯 천연덕스러운 이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전 회장이다. 그는 지난 4월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왼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박 대통령과 악수해 한국의 보수 언론을 힘들게 했다. 그 전에 이명박 대통령과 악수했을 때도 얼추 비슷한 자세였다.

ⓒ한성원 그림
누구를 만나든 이런 식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김대중 대통령과 만났을 때는 허리를 굽히고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정부 지도자 포럼에서 우리나라 초등학생 박영웅군을 만났을 때 역시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박군의 손을 감쌌다. 여느 인자한 할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이런 게 하도 자연스러워 차별당하는 사람이 불편할 겨를이 없다.

그가 같은 족속인 IBM 관계자들과 만났던 일화는 유명하다. 동종업계 최고 거물인 빌 게이츠를 만난다고 비싼 양복을 쫙 빼입고 갔던 IBM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이 저명한 인물이 떡진 머리에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셔츠 바람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찾아갔을 때 IBM 사람들은 평소 하던 대로 머리를 감지 않은 채였는데 뜻밖에도 빌 게이츠는 흠잡을 데 없는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다. 양쪽은 마주보며 배를 잡고 웃었고 협상은 대성공이었다. 이런 걸 보면 빌 게이츠가 사람 하나하나와 악수하는 이면에 아무 생각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건 그만의 유머감각이다.

미워할 수 없는 기이한 친구들

전 세계 양복쟁이들의 뒤통수를 갈겨주는 게 취미인 것처럼 보이는 인터넷 세상의 괴짜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들만 이해하는 퍼포먼스를 즐기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빌 게이츠, 폴 앨런,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에릭 슈미트,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 및 선마이크로시스템스 창립자 비노드 코슬라, 앤디 워홀, 줄리안 어산지 등등. 근시에 여드름 자국, 좁은 어깨, 악취, 지저분한 옷차림…. 사람들은 이제 그들을 더 이상 웃음거리로 삼지 않는다. 심지어 숭배하며 의지한다. 세상은 언제부턴가 그들을 너드(Nerd)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너드>외르크 치틀라우 지음작은씨앗 펴냄
철학·사회학·스포츠의학을 공부한 독일의 프리랜서 저술가 외르크 치틀라우가 쓴 〈너드〉(작은씨앗, 2013)는 바로 이 미워하기 힘든 기이한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너드’라는 말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1970년대 갑자기 캠퍼스에서 늘어난, 창백하고 성적 매력이라곤 없는 멍한 남학생들을 여학생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따위 여러 설이 있을 뿐이다. 설이야 어쨌건 1970년대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너드의 개선 행진은 이제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저자는 현상이 개념보다 오래됐다는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간다. 컴퓨터가 너드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컴퓨터는 너드에게 번성할 수 있는 풍족한 서식지를 제공했을 뿐이다. 세상의 변방을 떠돌던 너드는 드디어 완벽한 대화 상대를 찾았다. 컴퓨터는 그들이 단순한 별종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형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 나오는 페이스북 창시자 마크 저커버그와 적대적인 변호사의 대치 장면은 너드의 특징을 잘 알려준다. 변호사가 장황하게 늘어놓자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한다. “비가 오네요.” 당황한 변호사가 묻는다. “제 말 듣고 계신 겁니까?” “아니요.”

너드는 권력자나 기득권자에게 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과의 쩨쩨한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일광욕을 할지언정 공연한 신경전을 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뭔가 고귀하고 고상한 점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너드의 전형적인 특징을 열거한다고 해서 실제 너드를 만났을 때 이런 점들을 모두 확인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의 장점, 혹은 약점으로 캐리커처 그리듯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너드의 특징을 13가지로 요약했는데 최소 열 가지에 해당하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너드라고 불러도 좋다. 내 주변에서는 요즘은 휴직 중인, 지금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 신호철 전 〈시사IN〉 기자가 가장 너드에 가깝다.

노자,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너드’

이를테면 너드의 특징은 이런 거다. 일반적으로 지능이 높지만 IQ테스트 실패자도 왕왕 있다. 종종 자기만의 터널에 들어가 귀차니스트 같다. 그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때처럼 하느님 놀이 중이다.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도덕적이다. 상대가 자신과 비슷하게 도덕적이면 의리 있게 군다. 몸을 관리하기보다는 적대한다. 패스트푸드와 당분을 좋아한다. 그래서 근시가 되는 걸로 추정된다. 잠도 잘 자지 않는다. 아니 종종 잠자는 걸 잊는다. 몸매가 꽝이니 성적 매력도 그렇다. 본인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면 상대만 손해 보기 쉽다. 그들은 사람보다는,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학 같은 데 끌린다. 심하지 않은 자폐,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이가 많다. 그래서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한다. 빌 게이츠는 느닷없이 겅중겅중 뛰고 스티브 잡스는 변기에 발을 집어넣고 끊임없이 배수 밸브를 눌러댔다. 패션의 기준은 편하냐 아니냐이다. 샤워도 잘 하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가 자기가 만든 애플에서 7년간이나 쫓겨나 있었던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냄새였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앞만 보고 가는데 다른 사람도 다 그러리라고 여겨 주변을 힘들게 한다. 갤리선(돛과 노가 있는 전선) 노예들을 채찍질해 수상스키를 타려고 한다. 당연히 유머감각은 꽝이다. 웃기긴 하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너드 중에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타고났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남자가 한눈팔기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특징에 비춰보면 너드는 호모사피엔스만큼이나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남들 다 사냥 나갔는데 고대 동굴에 벽화를 그리면서 3D 효과를 아쉬워했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보기에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너드는 노자이다. 아르키메데스, 탈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도 너드이다.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얘기를 쓰고 있는지 강조하려고 무리했다는 인상도 들지만 뉴턴, 아인슈타인, 니체, 조지 오웰도 다 너드이다. 저자는 너드의 관점으로 이들 18명 전설의 삶을 다시 조명했는데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에도 너드는 넘친다. 너드 잠재 보유 강국에 속한다. 그들은 관제 알바가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인터넷 세상에서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눈이 온다” 하겠지.

세상 참 빈상이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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