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8일 오전 7시, 밤사이 내린 눈은 전북 익산을 하얗게 뒤덮었다. 새벽 미사를 끝낸 박창신 신부(71·베드로)는 수녀원 마당에 쌓인 눈을 쓸었다. 지난해 8월 익산 모현성당에서 사목 생활 39년을 마무리하고 은퇴한 이후 일주일에 3일간 수녀원에서 새벽 미사를 집전해왔다. 

다리를 절며 위태로운 몸으로 비질을 하는 중이었다. 문규현 신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왜 밖에 나가 있어? 자칫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엄혹한 시절, 같은 전주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문 신부는 박 신부를 챙겼다.

박 신부는 11월22일 군산 수송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의 시국미사 후 ‘종북 신부’로 몰렸다. “NLL, 문제 있는 땅에서 한·미 군사운동(훈련)을 계속하면 북한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청중 “쏘아요”) 그것이 연평도 포격사건이에요.” 강론 27분 가운데 1분여 한 이 말이 빌미가 됐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은 박 신부를 북한으로 보내라는 항의시위를 하며 화형식을 했다. 전주지검이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시사IN 송지혜시국미사 강론 이후 협박이 늘었지만 박창신 신부(위)는 초연했다. 그는 “사제라면 시대를 어렵게 만드는 비겁한 사람들을 꾸짖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창신 신부는 농부의 아들이다. 전북 익산에서 나고 자랐다. 그를 비롯한 여섯 남매 모두 가톨릭 신자다. 여동생도 수녀다. 그가 처음부터 신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말을 더듬는 데다 부끄러움이 많아 앞에 나설 용기가 없었다. 전북대 화공과에 입학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어쩌다 신학생을 만나기라도 하면 부러움이 솟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뒤, 광주 대건신학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하느님의 평화가 충만한 영적 기도를 올리는 신부가 되고 싶어 ‘데모질’에 한눈팔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1974년 순창성당에 첫 발령이 나면서 순창 가톨릭농민회(가농) 지도신부로 임명됐다. “농민은 나를 사회참여의 길로 향하는 사제가 되도록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농민들이 농촌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농민운동의 축이 되었어요.”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와서는 자신이 담당 형사라고 소개했다. 7년간 지도신부를 맡으면서 농협 민주화운동, 부당 농지세와 농가부채 해결투쟁 같은 농민 생존권을 위한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어느새 농민과 함께하는 거리의 신부가 되어 있었다. 10·26 이후 12·12 쿠데타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질적인 권력을 잡자, 그는 미사 때마다 “정치에 군인들이 나서면 안 된다”라고 강론했다. 사목회장이 “그렇게 말하면 성당 망해요”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광주의 진실 알리려 동분서주하다 테러당하기도

그가 ‘광주 학살’을 알게 된 건 1980년 5월19일이다. 광주 북동성당에서 열린 함평고구마 사건(함평군 농민들이 농협과 정부를 상대로 전개한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 1주년 기념식 참석차 광주를 다녀온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광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주교구에서 긴급 사제단 회의를 열고 광주 사건을 폭로하기로 했다. 김현장씨(광주 지역 활동가)가 만든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유인물 1만 장을 복사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박 신부는 문규현 신부와 함께 앰프를 구입해 아예 종탑에 내걸었다. 광주 학살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강론을 성당 밖 주민도 들을 수 있도록 방송한 것이다. 특히 여산성당에 속한 공소 가운데 광주 학살에 직접 참여한 제7공수단이 있는 금마공소(현재 금마성당)에서 “국민을 죽이는 군대는 민족의 군대가 아니다. 공수대원은 민족의 배신자다. 공수대원들에게는 집을 세주거나 쌀을 팔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창신신부 제공테러를 당한 이후에 여산성당에서 찍은 사진.

그로부터 한 달 뒤인 6월25일 밤 11시, 그는 평생 지우지 못할 상흔을 갖게 된다. 박 신부는 금마공소에서 수요미사를 끝내고 성당 사제관으로 돌아와 신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스포츠 머리를 한 괴한 4명이 들이닥쳐 쇠파이프와 칼을 휘둘렀다. 그는 전치 4주의 중상을 입었다. 한때 하반신 마비가 왔다. 당시 병문안을 온 신부들이 ‘신부 한 사람을 잃게 됐다’며 탄식할 정도였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3년 가까이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고, 지금껏 오른쪽 다리를 전다. 수사는 흐지부지되다 6개월 만에 ‘미제 사건’으로 처리됐다.

8년 뒤 전주교구 사제단은 재수사를 요청했다. 문정현 신부는 경찰청 민원실에 들어가 8일간 단식을 했다. 경찰은 재조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미궁으로 남았다.

그는 고통을 기도로 견뎌냈다. 1981년부터 꼬박 4년이 걸린 여산순교성지 작업을 도맡은 것이다. 1886년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면서 신자 22명이 순교한 곳이다. 교회와 순교지까지 고작 500m인데도 기다시피 이곳을 왕래했다. 불구의 몸을 이끌고 의지 하나로 이 일을 끝마친 뒤에야 그는 건강을 되찾았다.

1984년 군산 오룡동성당에 부임해 매월 한 차례씩 ‘군산시민강좌’를 열고 강좌를 녹음한 테이프 1000여 개를 전북 전역에 뿌렸다. ‘노동자의 집’을 구상한 것도 이 무렵이다. ‘복음에 의한 올바른 노동관’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노동법’ 등을 공부하면서 시민의식을 고취하려 한 것이다. “정의도 법도 없고 폭력적인 불통의 힘을 넘어서야 합니다. 현실에서 평화를 얻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간절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1987년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거리가 술렁거렸다. 전두환 정권의 퇴진과 폭력경찰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였다. 긴급조치로 인한 인권 탄압, 언론인과 공직자 해직 같은 일이 계속됐다. 박 신부가 만난 신자들 중에는 공안 탄압을 경험한 사람이 많았다. 6월항쟁 이후 노동자들의 불만과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하자, 그가 있던 군산 오룡동성당은 노조를 결성하는 아지트가 됐다. 택시노조가 결성되고 파업 및 가두시위가 불붙었다. 유리공장, 제지업체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박창신신부 제공박창신 신부는 강론을 통해 ‘5월 광주’의 진상을 알렸다. 신도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잘 들을 수 있도록 옥외 스피커를 달았다.

다른 신부들 눈에는 그가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미군에 의해 군산시민이 살해당한 사건과 화학공장의 맹독가스 누출 위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공동대표’ ‘위원장’ 직책을 거친 단체가 수십 개에 이른다. 1980년 테러 때처럼 지난 11월22일의 시국미사 강론 이후에도 협박이 늘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초연할 수 있다고 했다. 신명기 15장을 읽어 내려갔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절뚝거리면서도 그는 말했다. “사제라면 사람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권력을 탐해 적과 나를 구분하고, 시대를 어렵게 만드는 비겁한 사람들을 꾸짖어야지요. 예수를 믿으면 그처럼 살아야 합니다.” 여전히 그는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로,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고문으로 시대와 호흡한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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