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구치소로 피고인 접견을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들은, 변호사인 내가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모두 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 달 넘게 불법 구금되어 있으면서 몽둥이찜질과 물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학대받는 동안 가족들은 딸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한 젊은이는 62일 동안 불법 구금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던 김주열을 생각하면서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아들이 아닌지 가슴을 졸이며 뛰어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송병곤이었다.”(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중에서)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리는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은 1981년 여름 어느 날, 저는 부림사건의 피고인이었고, 당신은 변호인이었습니다. 제 나이 만 22세, 당신의 나이 35세. 이제 와서 나이를 헤아려보니 노 변호사님도 그때는 무척이나 젊었습니다.

ⓒ송병곤 제공필자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노무현 당시 변호사(왼쪽에서 네 번째).

처음 노 변호사님을 접견했을 때 저는 변론을 거부했습니다. 나중에 자서전을 보니 노 변호사님은 제가 변론을 거부한 이유가 노 변호사님을 정보기관의 끄나풀로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더군요. 사실 그때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변호는 스스로 하겠다고, 필요없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노 변호사님은 성실한 변론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하의 사법부는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징역 6년에서 1년6개월까지의 판결을 선고하였고, 저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부림사건 피고인들은 1983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기 시작하여 그해 연말까지 특사로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당감성당에서 송년회 겸 석방환영회가 개최되던 날, 이호철·노재열과 함께 노 변호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리러 사무실로 찾아갔었지요.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해주던 당신을 따라 처음 갔던 사우나의 어색함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함께 당감성당의 환영회에 참석하였지요. 술기운이 오르고 막판 춤사위가 어우러지며 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당신이 추던 곱사춤도 기억합니다.

저는 당신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1984년 4월부터 노무현 변호사사무실에서 직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어머님의 부탁이 있었다 하더군요. 첫 출근 날 영문도 모른 채 최병두 사무장님을 따라 간 곳은 맞춤양복점이었습니다. 치수를 재는 재단사에게 몸을 맡기고 있자니 사무장님이 “변호사님이 양복 한 벌 맞춰주라고 하더라” 하시더군요. 그렇게 따뜻하고 산뜻한 양복 한 벌 얻어 입고 사무실 직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직원들의 교육과 소양을 위해 매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민법을 강의했고, 민사소송법까지 강의한 후에야 아침 교육을 종료하였습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의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아침 8시에 출근을 하니까 강의시간에 졸리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강사인 노 변호사님의 노력과 열정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노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1984년 말부터 1985년 초까지 준비해 노동법률상담소를 개소하였습니다. 이후 노동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후배들과 사무실에서 우연하게 전태일 열사의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전국 최초의 노동법률상담소였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당신과 함께 전 직원이 올랐다가 보았던 지리산 세석에 걸린 엷은 구름이 그립습니다. 당시 따로 개업하고 계시던 문재인 변호사님의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에 올랐다가 하산 길에 길을 잃어 고생한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렇게 추모의 글을 쓰게 될 줄은…

민주화운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제가 사무실의 참한 여직원(지금은 저의 집사람이 되었네요)과 함께 중부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수동 2파출소로 연행되었을 때, 여직원의 연락을 받고 즉시 달려와 주었던 당신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경찰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노 변호사님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함께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당신은 분을 참지 못하고 운전을 하던 노주사님에게 불법 유턴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앞에 교통경찰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교통법규 위반으로 딱지를 받게 되었고, 뒤늦게 법조인의 차량이란 걸 알게 된 교통경찰들이 끈질긴 추적(?) 끝에 사무실까지 찾아와 ‘변호사인 줄 모르고 딱지를 발부하였다’고 오히려 미안해하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했는데도 당신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송병곤 제공‘부림사건의 변호인’ 노무현 의원은 ‘부림사건’ 피고인이었던 송병곤씨의 주례를 섰다.
이런저런 추억이 쌓이고 노동법률상담소가 확고히 자리를 잡아갈 즈음인 1985년 말, 저는 잘하지는 못하지만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고자 하는 미련 때문에 노 변호사님의 사무실을 그만두었습니다. 당시 노 변호사님의 심정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냥 노 변호사님은 자신이 좋아했던 저의 친구 두 명(이호철과 이성조, 당시 부산민주화운동협의회에서 실무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과 함께 근사한 회식 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저는 이후 노 변호사님과 함께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노 변호사님이 선거에 출마하실 때마다 선거운동원으로 부산 전역을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아, 마지막으로 부산 강서구에 출마하실 때는 낙선이 너무 뻔하게 보이는 곳만 고집하는 노 변호사님이 못마땅하여 성질이 나기도 하고, 집과의 거리도 너무 멀고 해서 자원봉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낙선한 당신은 외려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다’는 가슴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구절을 남겼습니다. 이를 계기로 ‘바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정치인 최초의 후원회인 노사모도 결성이 되었으니 저의 좁은 소견이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참, 노 변호사님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1990년 4월14일에는 제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습니다. 노 변호사님은 차가 많이 밀린다며 결혼식에 늦으셨습니다. 비록 늦게 열린 결혼식이었지만 다들 짜증을 내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저보다도 더 기뻐하고 축하해주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2002년, 이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50년 남짓 산 인생에서 2002년은 가장 행복했던 해입니다. 그해에 노무현의 대통령 경선이 있었습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과정이 전부 드라마였지만, 저에게는 경선 과정이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 재임 당시 당신을 한번 만나기는 하였습니다. 부산지방변호사회 사무직원회에서 청와대를 방문하였을 때 ‘고향 까마귀들이 반갑다’면서 당신이 직접 참석하였을 때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서 뵈었던 것이 전부입니다.

재임 기간이 끝나면 자주 찾아뵙고 버릇없이 굴면서 술 한잔 올리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집사람에게 봉하마을 한번 가자 말만 하고는 찾아뵙지도 못하고, 봉하마을에 전자편지라도 한통 보내자고 하면서도 게으른 탓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추모의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당신이 겪었던 부림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니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 유공자로까지 인정받았던 우리를 용공주의자라고 매도하며 부림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이 다시 차오를 무렵 당신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개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우리의 억울함을 잘 대변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당신의 그림자가 깁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

기자명 송병곤 (부림사건 피해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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