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는 자전거 타기다. 그중에서도 도로 사이클 타는 것을 가장 즐긴다. 여러 가지를 해봤지만, 자전거 타기보다 내 성향에 더 잘 맞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테니스도 쳐보고, 축구도 해봤지만 일단 짝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웠다. 골프 같은 것은 아예 운동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유학 시절 숱한 기회가 있었지만, 채 한번 잡지 않았다. 처음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문자 그대로 건강상 이유였다. 영국에 있을 때도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타고 다니긴 했지만, 운동을 하겠다며 본격적으로 자전거 안장에 오른 까닭은 망가져가는 몸을 추스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니 몸무게가 불어나서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병원에 가니 살부터 빼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등산을 시작했는데 무릎에 부담을 느꼈다. 주변에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면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고 살을 뺄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에 미니벨로가 한창 붐이었다. 저렴한 것으로 하나 사서 타기 시작했다. 살던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한강 자전거 도로로 진출해서 열심히 탔다. 어린 시절 온종일 자전거를 타던 생각도 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연합뉴스자전거를 타고 미시령 옛길(사진)이나 한계령을 오르는 대회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그런데 한강으로 나가기 시작하니,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슬슬 남의 자전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바퀴 두 개와 페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내게 별천지가 열렸다.

일단 뭔가 궁금하면 해봐야 하기 때문에 자전거들을 두루 섭렵해봤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도로 사이클이었다. 보통 산악자전거를 일정하게 타다 도로 사이클로 넘어온다는데, 나는 처음부터 도로 사이클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돌아가신 부친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어릴 때 부친은 도로 사이클광이었다. 집에 가면 무슨 기념품처럼 벽에 걸려 있던 노란색 도로 사이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날렵한 몸체와 바퀴가 관심을 사로잡았다. 인터넷 동호회 장터에서 가격 대비 성능에서 호평을 받던 타이완제 자전거를 하나 구입했다. 지인들과 어울려 한강을 돌아다니다 보니 슬슬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좀 더 세게 타보고 싶다는 유혹이 일었다. 뒤져보니 거의 준프로급 도로 사이클 클럽이 많이 있었다.

한강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길이는 총 90㎞ 정도이다. 처음에 10㎞만 달려도 헉헉거리던 체력이 90㎞를 타도 남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한강이 너무 짧았다. 게다가 보행자와 자전거가 뒤섞인 곳에서 도로 사이클의 속도를 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한강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보통 도로 사이클 클럽은 자전거숍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그중 관심이 가는 한 곳을 찾아갔다. 주로 경기도 하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클럽이었다. 라이딩 코스는 경기도 일대였다. 팔당댐을 돌아서 분원리와 남한산성을 돌아오는 코스였다. 한강을 떠나 처음 달려보는 코스였다. 여하튼, ‘토요라이딩’이라는 초보자를 위한 트레이닝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가볍게 나갔다.

실력이 비슷한 이들끼리 같이 타면 즐거움 배가

그런데 웬걸, 출발하자마자 뒤로 처져서 본대는 금세 종적을 감춰버렸다. 홀로 라이딩을 하는데, 클럽 총무가 나를 찾아서 가던 길을 돌아왔다.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리에 쥐까지 나서 쩔쩔매는 나를 다독이며 달리게 했다. 첫 번째 라이딩의 추억이다.

한강을 달리던 때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도로에서 달리니 비로소 도로 사이클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양다리의 힘만으로 물 흐르듯 달리는 바퀴의 전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몸과 일체를 이루는 자전거의 맛도 일품이었다. 게다가 팀으로 달리니, 본대에 섞여 보조를 맞추며 달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실력이 비슷한 이들끼리 박자와 리듬이 잘 맞으면 즐거움은 배가되는 법이다. 매주 나가서 도로를 달렸다.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상관없었다. 비나 눈만 오지 않으면 탈 수 있는 게 자전거였다. 더 이상 미니벨로를 타던 내 모습은 없었다. 몸무게도 급속하게 빠져서 과거의 몸매로 돌아갔다. 체력이 급상승해서 이제 120㎞ 정도 타줘야 좀 달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시 다른 것을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즌마다 열리는 각종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강원도 일대에서 열리는 힐 클라이밍 대회가 압권이었다. 도로 사이클을 타고 미시령이나 한계령을 올라가는 경기가 펼쳐진다. 대회에 대비해서 열심히 체력훈련을 하기도 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묘한 ‘마초이즘’이 넘실거리는 경험도 없지 않았지만, 도로 사이클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열심히 대회에 참가하기도 몇 년, 투어도 가고 즐거운 시절들이 갔다. 투어는 전국에 있는, 자전거 타기 좋은 코스를 개발해 타러 다니는 것이었다. 월악산 코스나 대청호댐 코스, 그리고 평화의 댐 코스는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180㎞가 넘는 거리를 도로 사이클로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거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풍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코스였다.

자전거에 대한 각자의 의미는 다를 것이다. 20세기 초반 자전거는 진보의 상징이었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기 위해 만든 최초의 바지 패션은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치마를 입지 않고 속바지만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는 여성은 해방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지금 와서 자전거에서 이런 급진적인 의미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친환경 운송수단이라는 상찬에 힘입어 지난 정권에서 쓸모없는 자전거 도로 건설에 핑곗거리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자전거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것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할 때 느끼는 고독의 벗이기도 하다. 공부하는 것을 자전거 타기에 비기기도 했지만, 자전거는 나에게 건강과 깨달음을 동시에 주는 벗이다.

기자명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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