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인들 대부분은 소유주가 되기를 원하는데 아파트 거래에는 땅이 포함되지 않는다. 셋째, 많은 가구들이 한 건물에 거주하기 때문에 각 세대는 그들의 생활수준이 곧바로 이웃에 노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71년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사회학)가 왕립아시아학회에서 발표한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망설이는 이유’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아파트에 관한 이 분석은 옛말이 됐다. 1979년 전국 주택의 5.2%에 불과하던 아파트는 지난해 47%까지 점유율이 올랐다. 이사 가고 싶은 주택 유형 1·2위는 ‘고층 아파트(50%)’와 ‘중저층 아파트(13%)’가 차지하고 나머지 33%를 단독·연립·다세대·다가구 주택 등이 나눠가졌다. 한 연봉 공개 사이트의 직장인 대상 설문조사에서 ‘월 급여 500만원 이상, 2000㏄급 중형차 소유, 예금액 잔고 1억원 이상’ 따위와 함께 중산층의 조건으로 꼽힌 것 가운데 하나도 ‘대출 없이 소유한 30평(99㎡)대 아파트’이다. 망설이기는커녕, 한국인은 아파트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시사IN 이명익서울의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아파트가 단순히 살고 싶은 주택 유형을 넘어선 지도 오래됐다. 신문이나 인터넷 분야별 뉴스를 뒤적여보면, 경기가 침체됐다는 보도의 대표 사례는 아파트 건설 경기 침체이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고 할 때의 부동산도 대부분 아파트다. 선거철마다 지역 정치인이 표를 얻느냐 마느냐는 그가 아파트 재건축에 어떤 견해인가에 따라 갈리고, 도시 내 골목길과 한옥과 재래시장이 사라지는 것도 모두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다. 그렇게 아파트는 현대 한국의 정치·사회·경제·문화를 재구성해왔다.

이런 한국 사회 아파트를 다양한 측면에서 비평한 책들이 최근 여러 권 출간됐다. 〈아파트〉(박철수 지음, 마티), 〈아파트 한국사회〉(박인석 지음, 현암사), 〈아파트 게임〉(박해천 지음, 휴머니스트) 등이다. 이 책들은 반세기 동안 급속도로 팽창해온 아파트의 역사를 짚으면서 획일적이면서 물질적이고 파편화된 삶을 대량생산해낸 아파트에 기본적으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최근 출간된 ‘아파트 분석서’. <아파트 게임> <아파트 공화국> <아파트 한국사회> <아파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왼쪽부터)

하지만 그 비판의 지점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 외관’이나 ‘사는(住) 곳을 사는(買) 곳으로 만든 투기 열풍’ 같은 단순한 표면이 아니다. 대신 한국인들의 ‘계급 상승 욕구’ ‘폐쇄적 공동체관’ ‘분양가 폭리에 대한 암묵적 동의’와 같은 폐부 깊은 곳을 찔렀다. (적어도 자산 증식 차원에서) 뜨거운 열기가 한소끔 식은 지금 오히려 아파트를 향한 사고(思考)를 확장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2006년 〈아파트의 문화사〉(살림 펴냄)를 통해 초기 아파트 건축 역사와 한국 소설 속에 나타난 아파트 선호의 병적 증상을 소개한 박철수 교수(서울시립대·건축학)는 새 책 〈아파트〉에서 ‘(아파트)단지’와 ‘전용 공간’이라는 새로운 쟁점을 제기했다. ‘단지’는 정부 영역에서 “공공재의 투자 없이 취약한 도시기반시설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 기획이자 공간정치학”이고, 모델하우스·발코니·평면 구성으로 부리는 건설사들의 속임수 마법에 알고도 속아주는 이유는 입주민들이 ‘전용 공간’이라는 자폐적 공간의 확장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1964년에 처음 생겨

박인석 교수(명지대·건축학)가 쓴 〈아파트 한국사회〉는 아파트 ‘단지’의 문제점을 좀 더 촘촘하게 들여다봤다. 모양과 크기가 같은 아파트 건물이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고 그 사이를 놀이터, 주차장, 관리사무소, 상가 등이 채우는 지금의 아파트 단지 전형을 처음 보여준 곳은 1964년 대한주택공사가 서울 도화동에 지은 마포아파트(1994년 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됐다)다. 이후 동부이촌동 한강맨션(1970), 여의도 시범아파트(1971), 구반포 주공아파트(1971), 압구정 현대아파트(1975), 잠실지구(1976) 등 지금까지도 부동산 시장을 이끄는 굵직한 아파트 단지들이 연이어 준공됐다.

 

점점 진화해 수영장과 도서관이 있고, 인공 시냇물이 흐르며, 차단기로 수상한 외부인의 출입도 막아주는(물론 이 모든 비용은 입주자가 높은 분양가나 전세금으로 지불한다) 오늘날의 아파트 단지를 두고 박 교수는 ‘열악한 도시 환경이라는 사막 속에 자리 잡은 사설 오아시스’라고 표현했다. 자기 돈 들여 주거 환경의 질을 높이겠다는 데 토 달기가 쉽지 않지만, 문제는 이 사설 오아시스가 확장될수록 그 밖의 비아파트 단지 지역은 공공 투자 없이 더욱 과밀하고 열악해진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아파트 단지가 당장 비아파트 단지 사람들의 주거 환경을 쪼그라뜨릴 뿐 아니라 미래 우리 도시 공간의 생태계 전체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도시 생태계는 편의점에서 옷가게로, 옷가게에서 떡볶이 가게 등으로 거주자와 보행자 수요에 따라 자율조정력과 기동력을 발휘하는 소필지가 많아야 원활히 순환할 수 있는데,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하면 필연적으로 그런 소필지들이 대거 잠식되기 때문이다. 박 교수 표현대로라면 ‘도시의 동맥경화’를 부르는 현상이다.

앞서 소개한 두 책과 달리 〈아파트 게임〉의 저자는 건축학자가 아니라 디자인 연구자이다. 홍익대·국민대 등에서 디자인사를 가르치는 박해천 강사는 “디자인의 역사는 중산층의 역사이고, 한국 중산층의 역사는 곧 아파트의 역사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을 기록했다.

그 섬세한 기록을 위해 박씨는 각 세대의 생애 주기에 그들이 인생에서 경험한 정치사회 현상과 ‘아파트 신화’를 대입했다. 4·19, 5·16을 경유해 ‘조국 근대화’의 실무자로 변신할 30대 즈음에 압구정·반포·잠실 등지에 갓 지어진 아파트가 1년 만에 값이 두 배로 오르는 신기한 현상을 목격한 4·19 세대(1940년대생), 1987년 6월 넥타이를 매고 시청이나 명동성당 인근을 서성거리기도 했지만 목동·상계동·과천 등 신시가지 아파트 분양 기회는 놓치지 않은 유신 세대(1950년대생), 변혁을 꿈꾸다 서른 즈음에 정치적 무기력에 봉착했지만 분당·평촌·일산 등 신도시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광장의 기억을 중산층 진입의 꿈으로 갈음할 수 있었던 386 세대(1960년대생).

하지만 그 신화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뜨겁게 들끓던 2000년대 초·중반 아파트 게임 현장에 뛰어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하우스푸어로 전락했다. 애초 그 게임에 뛰어들지 않은(못한) 197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하우스푸어보다 더 낫다고도 할 수 없는 렌트푸어(전세 빈곤층)가 되거나 혹은 원룸·고시원 등을 전전하는 ‘큐브(방)’ 무한 순환 열차에 탑승했다. 박씨는 “내 집 마련의 사다리가 무너진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남은 것은 부모의 노후자금을 털거나 은행 대출을 통해 내려온 가느다란 동아줄을 잡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들 책에 앞서 일찍이 한국의 아파트 신화를 연구한 본격 아파트 담론서는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이다.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정점을 찍고 꺾이기 직전인 2007년 출간된 이 책에서 줄레조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드는 대단지 아파트는 20~30년 후 건물 노후화나 단지 관리비용 등을 이기지 못하고 심각한 도시 문제로 전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파트 가격 하락이 시작된 2009년 〈아파트에 미치다〉(이숲)를 쓴 전상인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는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등을 통해 아파트 소유자들이 끊임없이 자기 재산 가치를 지킬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현재의 고가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라며 줄레조의 주장을 반박했다.

줄레조와 전 교수의 전망 가운데 어느 쪽으로 상황이 전개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암울할까?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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