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 수도' 수녀들이 거리로 나선 까닭
  • 변진경 기자
  • 호수 33
  • 승인 2008.04.2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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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들이 뿔났다. 주민 생존권을 무시하는 기업과 지자체에 화난 수녀들은 여러 언론사에 취재를 요청했지만 몇몇 지역 매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늘 일어나는 일"이라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녀들은 그 사실이

   
ⓒ시사IN 한향란
트라피스트수녀원 수녀 27명은 하루 일곱 번 세상의 약자를 위해 기도한다(위). 이번에는 그들도 ‘약자’가 됐다.

첫 기도는 새벽 3시30분에 시작된다. 기도실은 어둡고 고요하다. 앉고 일어설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27벌의 수녀복 소리가 이따금 적막을 깬다. 하루 7번, 15분여 씩 수녀들의 기도는 고요 속에서 반복된다. 경남 마산시 구산면 수정리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수정 성모 트라피스트수도원. 그곳에서는 27명의 수녀가 ‘봉쇄 수도’ 생활을 한다. 기도와 노동, 독서가 일상의 전부이다. 옷과 음식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자급자족한다. 심각하게 아플 때 등을 제외하곤 바깥에 나가지 않는다. 수도원 곳곳에는 ‘침묵’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수도원의 고요가 위협받고 있다. 수정리 마을 바로 앞 23만여㎡ 매립지에 STX중공업 조선기자재 공장이 들어선다. STX중공업은 미리 제작된 선박 블록을 연결하고 그 부분만 페인트칠하는 PE(Pre-Erection) 공정만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수녀들로서는 조선소에서 날아오는 소음과 분진이 걱정될 수밖에 없다. 노동시간을 채우는 텃밭 농사와 유기농 잼 생산·판매도 무사하기 힘들다. 1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장 예정지와 마주보며 살게 된 수정리 주민은 걱정이 더 크다. 공장 유치를 반대하는 주민과 수도원은 8개월간 마산시·STX중공업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첫 단추는 18년 전에 이미 잘못 꿰였다. 1990년, 마산시는 장복건설에 매립 허가를 줘 항아리처럼 오목하게 바닷물이 들어선 수정만을 메우기 시작했다. 서민과 저소득층을 위한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라 했다. 주민들은 마을이 발전하리라는 기대에 찼다. 가구당 300만원 정도씩 어업보상을 받고 일터를 버렸다.

하지만 마산시 곳곳에 아파트 단지가 생겨나고 인구가 줄면서 수정리에 아파트를 지을 이유가 사라졌다. 건설사는 부도나고 매립지는 애물로 전락했다. 두산건설이 사업권을 인수했지만 매립은 18년 동안 끝나지 않았다. 그때 STX중공업이 매립지에 관심을 보였다. 마산시는 ‘고마운’ 기업의 발목을 잡기 위해 매립지가 공장용지로 바뀌기도 전에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가사용승인을 내줬다. 경상남도에서 반려한 매립목적 변경승인도 행정심판을 통해 기어이 얻어냈다. 

마산시는 STX공장 유치를 수정리는 물론 시 전체가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로 여긴다. 설사 수정리 주민이 공해로 피해를 입더라도 3000명 일자리 창출, 매해 세수 160억원이라는 ‘대의’를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견해이다. 공장 유치를 찬성하는 주민 모임 수정발전위원회 김영곤 위원장(46)은 “STX 같은 대기업이 기업 이미지도 있는데 설마 주민 보상이나 공해 방지를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나. 이왕 버려진 매립지에 들어온다고 하니 우리 주민은 어떻게 실익을 챙길 건지 머리를 모아야 할 텐데 무턱대고 반대만 하니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시사IN 한향란
산에서 내려다본 수정리 마을 전경. 중간의 넓은 부지가 조선공장이 들어설 매립지다. 오른편 점선 안에 수녀원이 보인다.

수정리 주민 "더는 속지 않는다"

반대 측 주민과 수도원 수녀들은 시와 STX중공업을 섣불리 믿지 않는다. 마산시 비전사업본부 고양수 계장은 “시장님과 STX 강덕수 회장님이 친필 사인한 ‘수정리 발전기금 40억원 약속’ 공문도 믿지 않는 주민에게 더는 할 말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불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번 데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쯤 매립지 쪽에서 ‘6·25때 포탄 떨어지던 소리보다 큰’ 굉음이 났다. 기계들이 왔다 갔다 하기에 시청에 물어보니 ‘태풍피해 예방’을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STX중공업은 시청의 ‘가사용 승인’ 아래 주택용지에서 3개월간 불법으로 선박 블록을 만들었다. 분노한 주민들이 항의하자 지난해 11월 황철곤 마산시장은 “주민 절대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매립목적 변경 행정절차는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민을 달랬다. 약속은 또 뒤집혔다. 올해 3월 황 시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시장직을 걸고 STX 공장을 유치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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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피스트회 수녀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수정리 마을 주민과 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었다(위).

수정리 주민대책위원회 박석곤 공동위원장(55)은 마산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해서 사태가 악화됐다고 주장한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대의를 위한 희생’을 얘기했으면 몰라도, 애초에는 땅값 올라가고 살기도 좋아진다는 등 수정리 주민을 꾀기만 했다.” 마을회관에 앉아 있던 주민 권택용씨(68)는 ‘이주 보상’ 얘기에 손사래를 친다. “10억원을 준다 한들 아버지, 어머니 묘가 바로 저기 있는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옆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노인 셋이 “그 말이 옳소!”라고 소리쳤다.

이미 조선소가 들어선 진해와 거제를 견학한 뒤 반대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주민들은 쇳가루 때문에 빨래도 마음 놓고 못 너는 진해 죽곡마을이 수정리의 미래가 될까봐 두려워했다. 공장 유치를 찬성하는 수정발전위원회 김영곤 위원장(46)조차 “진해 죽곡마을처럼 된다면 나도 목숨내놓고 반대할 거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주민들은 지형상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안에서만 맴도는 수정리가 죽곡마을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본다. 마산시와 STX중공업은 ‘비전문가적인 우려’라고 부인한다.

기나긴 싸움 속에서 형, 아저씨, 숙모 사이였던 380여 세대 수정리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누군가가 벌써 3억원을 먹었다는 소문도 돌고 폭행 사건도 일어났다. 32년간 주민 건강을 돌봐주던 마을 보건진료소장은 마을회의에서 공장 유치 반대쪽을 거드는 발언을 한 뒤 갑자기 다른 마을로 발령이 났다. 봉쇄 수도원에서 문을 열고 나선 수녀들에겐 ‘알아듣지도 못할 욕’이 쏟아졌다. 임오틸리아 수녀는 “처음 욕을 들었을 때 구역질이 났다”라고 말했다.

   
ⓒ시사IN 한향란
수녀원은 STX중공업 공장 유치를 설득하러 오는 마산시 공무원의 방문을 거부한다.

마산시는 4월까지 어떻게든 STX중공업 조선기자재 공장 유치를 위한 행정 절차를 마무리한 뒤 ‘가정의 달’ 5월에는 수정리 주민화합잔치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다수 주민은 “막걸리 한 잔에 붉힌 얼굴을 풀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라고 말한다. 여전히 “매립지에 드러누워서라도 막을 거다”라고 버티는 주민도 적지 않다. STX중공업이 수도원을 조용한 곳으로 옮겨준다고 약속했다지만 장요세파 원장 수녀는 단호히 거절한다. “주민들이 받을 수 없는 특혜는 우리도 받지 않을 겁니다.”   

"우리마저 떠나는 세상을 원하나요?"

수정 트라피스트 수녀원은 ‘당분간’ 침묵의 일상을 포기했다. 세계 180여 트라피스트수도회를 총괄하는 로마 베르나르드 올리베라 총장 신부에게 외출을 허락받았다. 원장 수녀와 주비아, 임오틸리아, 오세바스찬 수녀는 일종의 ‘TF’를 꾸려 하루에도 몇 번씩 분주히 대책을 논의한다. ‘홍보 담당’ 주비아 수녀는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다닌다. 최근에는 느리게나마 문자 메시지를 쓰는 법도 배웠다. 임오틸리아 수녀는 컴퓨터 문서와 동영상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전문가가 됐다.  

STX유치 TF팀 이수균 구산면장은 “수도원만 개입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일이 장기화되지 않았다. 수녀들이 얄밉다”라고 원망했다. 신자 몇몇도 “시끄러운 바깥 세상 일에 왜 끼어드시느냐”라며 만류한다. 하지만 수녀들은 그들에게 되묻는다. “여러분은 수도원 수녀들조차 자기만 보상받고 동네 일은 나 몰라라 떠나는 그런 사회를 원하나요?”

수정리 보건진료소장 징계·발령 소식에 하루 종일 분주했던 4월21일, 수녀들은 규칙을 어기고 밤 10시30분까지도 수도원 불을 끄지 않았다. “여기를 떠나면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을 거예요. 좋고 싫고를 떠나 우리도 현실 속에 살고 있네요.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풍토가 간절한데, 참 쉽지 않아요.” 향후 대책을 논의하는 수녀들의 회의는 세상을 향한 그날의 마지막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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