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 한국인들에게는 한때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포의 땅이었으나,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전쟁과 학살, 마피아, 경제적 혼란으로 표상되는 나라들이다. 작가 유재현이 6개월여 동안 CIS와 동유럽의 깊숙한 내면을 탐사하고 돌아왔다. 〈시사IN〉은 지금도 방진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체르노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알려진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 등에서 작가가 울고 웃고 분노하고 회한에 떨었던 기록을 연재해왔고, 이번이 마지막 회다.


체코의 프라하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를 예정이었던 믈라다볼레슬라프에서 이틀을 머물러야 했다. 독일 드레스덴에서 고쳤던 차가 50㎞ 정도를 달린 후에 다시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틀 동안은 드물게 화창한 날이 이어져 믈라다볼레슬라프의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거닐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벽에 붙은 서커스 광고지였다. 좋은 기회였다. 1년 동안 머무렀던 몰도바의 키시나우에도 시내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커스 상설 공연장이 있었다. 왕관 모양을 한 건물은 국립극장 못지않게 규모도 컸다. 오페라나 발레보다는 그쪽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섭섭하게도 1년 내내 문이 닫혀 있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유재현〈/font〉〈/div〉체코 카리니 서커스단의 공연. 가끔씩 실수가 나와도 관객들은 즐거워했다.
ⓒ유재현 체코 카리니 서커스단의 공연. 가끔씩 실수가 나와도 관객들은 즐거워했다.

서커스란 결국 소련과 운명을 같이한 그 무엇이었다. 소련이 해체될 당시 연방 전역에는 서커스 상설공연장이 70개나 있었고 이동 공연장이 50개 있었다. 1990년대 이후 대부분은 문을 닫았고, ‘모스크바 서커스’처럼 그나마 세계적 명성으로 버티는 곳만 남았다. 6000명이 넘었던 공연자들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여서 대개는 일자리를 잃었고 일부는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으로 진출했다.

아파트 단지 공터에 천막을 친 서커스단의 이름은 카리니 서커스. 소개에 따르면 1880년에 체코에서 서커스를 시작했던 유서 깊은 알레스 가문의 서커스단이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대개는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부모다. 노인도 간간이 눈에 띈다. 공연은 생각보다 길게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어릿광대의 우스개 장난과 소녀들의 묘기, 접시돌리기에다 사자와 말이 등장하는 서커스는 평범했다. 위험한 곡예는 없었고 사자가 등장했을 때를 빼고 출연자들은 가끔씩 실수를 했다. 모스크바 서커스단이 보여주던 그 전설의 공중 발레 ‘학들의 비상’을 연상케 하는 장면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해맑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부모들은 즐거워했으며 노인들은 애수가 서려 있을지언정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다.

ⓒ유재현프라하의 옛 시가지 광장.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동상이 있어 ‘종교개혁 광장’으로 불린다.

서커스가 유난히 사회주의권에서 발달했던 것은 ‘평등주의’를 가장 잘 실현한 장르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이때의 평등주의란 (심오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세상의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의 아이들도 국립극장의 발코니에 앉아 있기를 싫어했을 테니까. 국가적 차원에서 서커스 육성이 시작되었고 1927년에는 전문 공연자를 배출하는 학교가 모스크바에 등장했다. 서커스단은 국영이었고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전형적인 예가 공중 발레를 실현한 ‘학들의 비상’이었다.

서커스, 평등주의를 실현한 장르

그러나 시장경제가 도입된 1990년대 이후 서커스는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빛의 속도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제는 민영화에 성공한 일부만이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정기 순회공연을 펼치는 ‘모스크바 국립 서커스’도 소련 시절에 쓰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사기업에서 운영한다.

공연이 끝나고 거리로 나서자 카리니 서커스 천막에도 해거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손녀의 손을 잡고 내 앞에서 걷고 있는 은발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에도 그늘이 깔렸다. 서커스란 것.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사라져가는 것들이 모두 그렇지만.

믈라다볼레슬라프에서 프라하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지금의 체코는 보헤미아 왕국의 뒤를 이었는데 프라하는 왕국의 수도였다. 10세기에 프라하 지역을 근거로 등장했던 보헤미아 공국이 후에 영토를 확장해 15세기쯤에 왕국이 되었고, 뒤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보헤미아’라는 이름은 주로 외부에서 사용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의 땅과 사람들을 가리켜 ‘체코’라 칭했다.

보헤미아 사람들을 가리키는 보헤미안은 ‘배가본드(방랑자)’와 비슷한 뜻이다. 유럽에서는 둘 모두 ‘가난뱅이 떠돌이’ ‘범죄자’ ‘도망자’ 등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배가본드와는 달리 보헤미안은 지역적 편견까지 내포하고 있다. 예전에는 주로 프랑스인들이 집시를 ‘보헤미아에서 온 사람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집시는 훨씬 먼 곳에 뿌리를 둔 집단으로, 유럽에서 보헤미아를 거쳐 퍼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집시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보헤미아 사람들이 더해진 것이다. 늘 이런 식이다. 지역주의와 인종주의에 근거한 차별이란 무지에서 출발해 슬금슬금 자라나고 증오와 갈등이 필요한 자들이 프로파간다(선전)와 선동을 양분으로 견고하게 완성시킨다. 나치가 배양한 집시와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결국은 학살로 이어졌다.

프라하 중앙역에서부터 걷다 보면 역전을 벗어나기 전에 윌슨과 마주친다. 민족자결주의의 바로 그 우드로 윌슨 미국 제28대 대통령의 동상이다. 4.2m라는 꽤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 아래에 ‘세계는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해져야 한다’라는 1917년 4월 윌슨의 의회 연설 중 한 대목이 영어와 체코어로 새겨져 있다.

ⓒ유재현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를 교. 서른 개 남짓한 석상과 동상들이 난간을 장식하고 있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절절한 외침

민족자결주의가 등장한 것은 1918년 1월8일의 의회 연설에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10월28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민족자결주의의 도움을 받았다. 프라하 중앙역 앞에 윌슨 동상이 세워진 것은 그 때문이다. 동상의 운명은 좀 기구했다. 중앙역(1919년 윌슨역으로 이름을 바꾼 바 있음) 앞에 체코 출신 미국인 알빈 폴라섹이 조각한 동상이 선 것은 1928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때를 맞췄다. 그러나 1941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나치가 이 동상을 녹여 없앴다. 동상이 돌아온 건 극히 최근인 2011년 9월이다. 미국 쪽에서 돈을 댔지만 체코 조각가들이 만들었다. 남아 있는 사진과 부분 석고상 등을 참고해 1928년의 것과 동일하게 복원했다.

프라하 옛 시가지의 길은 대개 좁고 구불구불해 헤매기 십상이다. 돌고 돌다 막혔던 시야가 툭 트였다. 가장 먼저 옛 시청 건물의 금빛 천문시계가 눈에 띈다. 시간마다 해골이 줄을 당기면 창문 두 개가 열리고 예수의 12제자가 등장한다지만, 둔한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이다. 하지만 15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진 시계로 당시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시계는 지금의 시계와는 달리 천체의(天體儀) 같은 것이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마에서 김이 날 만큼 복잡하다.

천문시계탑을 돌면 ‘종교개혁 광장’이다. 거의 중앙에 원형의 돌 기단 위에 선 동상이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종교개혁 광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주인공이다. 면죄부를 팔아 치부하던 가톨릭과 교황청에 반기를 들고 청빈한 교회를 주창했던 신학자였다. 프라하 대학 교수이기도 했던 얀 후스는 그저 이론만 읊조린 것이 아니라 대중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설교로 피력하곤 했는데 그로써 교황청의 적을 자처했다. 마틴 루서 킹보다 100년을 앞섰으니 선각자로서 얀 후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얀 후스는 1414년 왕의 동생이 안전을 보장하자 스위스 콘스탄츠의 종교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자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곧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듬해인 1415년 7월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지금의 기념비는 얀 후스의 사거 500주년을 맞은 1915년에 세워졌다. 기단에는 체코어로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혹은 정의)을 부정하지 마라.” 후스가 감옥에서 보낸 열 번째 편지의 마지막에 적었던 이 글은 종교재판에 대한 항소 이유서의 한 구절이기도 한데 울림이 크다.

다시 구부정한 좁은 길을 걷다 보면 또 앞이 툭 트인다. 블타바 강이다. 이 강을 가로질러 구시가지와 프라하 성을 잇는 카를 교는 15세기 초에 완공되었다. 난간을 장식하고 있는 서른 개 남짓한 석상과 동상들은 지금은 모사품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다리를 파리나 부다페스트 등의 다리와는 달리 특별하게 만든다. 동상 중의 하나는 이름이 얀 네포무크이다. 궁정 사제였던 이 사람은 고해성사로 왕비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눈치 챈 왕이 네포무크를 불러 이실직고할 것을 명하나 거부했다. 그 결과 블타바 강에 던져져 목숨을 잃었다. 사제로서 고해에 대한 비밀 엄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동상으로 카를교 난간에 서 있는 네포무크의 표정은 심하게 어지럽고, 기운을 잃은 몸은 연체동물처럼 휘청거리고 있어서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교황청에 맞서는 일도 아닌 왕비의 바람기쯤이었다면 슬쩍 알려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래서야 누가 고해성사를 하겠는가. 얀 네포무크가 블타바 강에 던져진 것은 1383년으로 전해진다. 사제를 흥신소 직원으로 취급했던 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던 바츨라프 4세로 교황청과 각을 세우고 얀 후스를 후원하기도 했던 그 왕이다.

ⓒ유재현1968년 ‘프라하의 봄’ 무대가 된 바츨라프 광장. 1945년 반나치 봉기도 여기서 일어났다.

카를 교를 넘어 라젠스카 거리 쪽으로 향하다 보면 ‘존 레넌 벽’을 만난다. 1980년대에 등장한 것으로 존 레넌의 초상화나 노래의 가사 등이 벽을 장식했다고 한다. 냉전 시대이니만큼 당연히 당국에게는 ‘요주의 장소’가 되었고, 낙서를 지우고 다시 그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레닌주의에 빗대 ‘레넌주의’라는 말도 등장했다고 한다.

레닌주의가 아니라 레넌주의?

1980년대의 프라하에 어쩌다 1960년대의 상징인 존 레넌이 등장했는지는 수수께끼에 가깝다. 헷갈리기는 관계 당국도 마찬가지여서 알코올중독자라거나 정신병자, 자본주의 스파이 등으로 매도했다. 더욱이 ‘존 레넌 벽’에는 가끔씩 세태를 정곡으로 힐난하는 반정부 낙서들이 등장했던 이유로 방치해둘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운다고 없어지면 이미 낙서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아직도 존 레넌의 벽으로 불린다. 벽에는 그래피티(거리 낙서)가 난무하는 가운데 존 레넌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평화의 심벌도 한구석을 차지한다. ‘철수는 영자를 사랑해’ 같은 전형적인 초등학교 화장실 낙서도 있긴 하지만.

다시 중앙역 근처를 배회하다 바츨라프 광장에 섰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나 1989년 벨벳 혁명의 무대였지만 특별한 기념물은 없다. 프라하의 봄 이후인 1969년 1월 분신으로 침공에 항거했던 대학생 얀 팔락의 기념비가 광장 바닥에 있다. 1945년 5월, 반나치 봉기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 체코인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독일군들을 몰아내고 프라하를 해방시켰다. 소련군이 프라하로 진군하기 하루 전이었다. 바르샤바 봉기와 비교할 만하지만 시작과 끝, 내용이 전혀 다른 봉기였다. 마땅히 긍지를 느낄 만한데 그 흔한 기념비 하나 없다. 프라하에서는 그렇게 역사의 무게가 가볍다. 밀란 쿤데라 식으로.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이 된 알렉산드르 둡체크의 개혁정책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는 침체를 거듭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산업화를 이루었던 체코슬로바키아에 도입된 소련식 경제는 잘 맞아 돌아가지 않았다. 1968년 4월 둡체크(당시 공산당 서기장)가 발표한 ‘행동강령’은 경제는 물론 정치·외교 전반에 걸친 개혁 내용을 담았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 신장, 검열의 완화, 소비재 생산의 강조, 서방과의 관계 개선 등을 담은 이 강령은 이른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선언이었다. 둡체크의 사회주의는 이런 말로 요약되었다.

“사회주의는 착취적 계급관계 아래 지배당하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뿐 아니라 어떤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개인의 충만한 삶을 더욱 잘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소련의 반응은, 1968년 8월20일 병력 20만과 탱크 2000대를 동원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었다. 둡체크의 집권으로 시작한 프라하의 봄에 틔운 새싹은 그렇게 목이 잘렸다. 같은 해 11월 등장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소비에트 블록 내의 어떤 개혁도 무력으로 분쇄할 것임을 선언했다. 아마 둡체크의 체코슬로바키아가 마지막 기회였던 걸까.

17년 뒤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이 한때 둡체크가 시도하려 했던 개혁과 동일하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새로운 사회주의도, 새로운 소련도 아닌 몰락이었다. 어떤 일이건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 ‘동유럽-CIS 기행’을 이번 호로 마칩니다.

기자명 유재현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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