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형시키는 검사와 판사의 오판을 용서하소서”
  • 정희상 기자
  • 호수 32
  • 승인 2008.04.2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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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은 1106명이다. 이 중 998명이 처형됐다. 1983년부터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형장에서 ‘사형수의 최후’를 지킨 문장식 목사의 ‘사형 일기’.
   
ⓒ시사IN 한향란
사형당한 사람들이 묻힌 공동묘지를 둘러보는 조성애 수녀. 그녀는 사형 집행보다 범죄 예방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시사IN> 조사에 따르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법원에서 최종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은 1106명이다. 그 가운데 현재 사형 집행이 유보된 58명과, 무기수로 감형된 48명을 제외하고 1000명이 죽었다. 998명은 교수형, 1명은 병사했으며 나머지 1명은 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역사상 최초로 사형수가 자살하는 사건이 지난해 4월29일 부산구치소에서 일어났다. 1998년 살인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 중이던 전 아무개(50)는 편지 봉투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 죄송하다’는 짤막한 유서를 남기고 감방 화장실에서 붕대를 목에 감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과 3범이던 그는 사형수로 지내면서 불안장애와 대퇴골 무혈성 괴사 증세에 시달려 의료사동에 수용된 상태였다. 

이승만 정부 이후 김영삼 정부 말기까지 사형 집행은 거의 연례 행사였다. 김영삼 정부는 재임 기간에 사형수를 57명 처형했다. 특히 ‘마지막 사형 집행’으로 기록된 1997년 12월30일에는 여성 사형수 4명을 포함해 23명을 무더기로 집행했다. 유신 독재가 절정이던 1976년 이후 사상 두 번째로 많은 수였다.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마지막 결정은 법무부 장관 몫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통령이 비공식 결재하는 것이 관행이다.

법무부 장관의 사형 집행 결재가 떨어지면 즉시 대상 사형수가 수감된 전국 5개 구치소로 대검찰청의 명령서가 내려진다. 집행 대상 사형수를 지목해 ‘사진을 촬영하고 건강진단을 실시해 결과를 보고하라’는 내용이다. 교도관은 이때 사형 집행 낌새를 알아챈다. 보고가 끝나면 법무부 장관이 구치소장에게 사형집행 명령서를 내려보내는데 시기는 대개 집행 하루 전날이다.

사형 집행일까지도 해당 사형수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당사자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금세 눈치챈다. 형 집행 당일에는 모든 사형수가 운동을 하지 않는다. 평소 틀어주던 방송도 끊는다. 구치소 내 모든 통로 출입이 엄격히 봉쇄되면서 무거운 죽음의 침묵이 감돈다.

아무리 합법이라지만 ‘사람의 생명을 끊는 일’이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맡는 교도관은 적잖은 심적 고통에 빠진다고 한다. 사형 집행 경험이 있는 광주교도소의 한 교도관은 “참여하고 싶지 않아 아내의 임신이라든지 부모의 병환, 꿈자리 등을 내세워 서로 미루고, 휴가를 내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사형 집행을 맡은 교도관 중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사표를 내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들어서는 고육책으로 사형 집행 순간 교수대 바닥이 꺼지도록 하는 버튼을 여러 개 만들어 누가 실제 집행자인지 모르게 했다.

사형수를 감방에서 교수대로 데려가는 일을 맡는 교도관 3명은 연출교도관이라 불린다. 이들은 해당 사형수가 자살하거나 난동을 부릴 경우에 대비해 사동 입구에서 모든 사형수 이름을 일일이 호출한다. 사형수 전원은 감방을 나서 교수대로 가는 길목(이른바 지옥 3정목)에서 교무계장과 종교담당 교도관을 마주한다. 그 두 사람이 손을 꼭 잡는 사형수가 집행 대상이다. 집행을 면한 나머지 사형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만 공포감에 며칠간 식음을 전폐한다.

   
ⓒ연합뉴스
기독교계가 펼치는 사형 폐지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문장식 목사.
사형이 집행된 시신은 가족·친지에게 인도하지만 사형수는 가족과 인연을 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교도소 내 묘역에 가매장한다. 종교에 귀의한 사형수는 유언이 있으면 각 종교의 묘역에 안장한다.

1983년부터 서울구치소 종교위원으로 활동해온 문장식 목사는 사형 집행이 이뤄진 15년 동안 그들이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사형수가 연출교도관에 의해 교수대 앞으로 끌려 들어오는 장면은 마치 소가 도살장에 들어오는 모습과 같다. 사형 집행자와 입회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이나, 억울하다고 울부짖던 일부 사형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도 사형 집행이 끝나면 몇 달 동안 충격 때문에 인격이 마비되는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여러 날 몸살을 앓고, 한동안 교화 의욕을 상실할 때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계 사형폐지운동의 대부가 된 문 목사는 얼마 전 사형 집행장의 일기를 토대로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문 목사의 일기에는 크고 작은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형수 60명의 최후가 다음과 같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감옥에서 한글 깨친 사형수 강순철(29)
가난한 이농 출신 도시 빈민의 아들 강순철은 노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용산에서 살다가 중학교를 중퇴했다. 폭력 혐의로 춘천에 있는 소년원에 들어가 20개월을 살고 출소한 지 3년 만에 살인 방화를 저질렀다. 강씨는 1989년 취직한 봉제공장에서 송 아무개양과 만나 교제하다 어느 날 그의 소년원 전과를 알고 나서부터 여자친구가 그를 피했다고 한다. 강은 여자친구 송양이 만리동 봉제공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최 아무개씨와 술에 만취한 채 찾아가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는데, 송양 대신 잠자던 박진희양이 사망하고 또 다른 박 아무개양이 중화상을 입었으며 봉제공장이 전소돼 5000여 만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경찰 탐문수사로 체포된 강씨는 방화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돼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글을 몰라 편지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그는 1993년 교회의 도움으로 글을 제대로 깨치고 예수를 믿으며 변하기 시작했다. 1994년 1월 그는 편지를 보내 “목사님 저는 10년이나 20년 뒤라도 만일 나갈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살아가는 장애인의 손발이 되어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지만 광주교도소로 이감했다가 1997년 12월3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간 살인범이 된 농부 유영택(29)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홍성의 한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유영택은 1991년 10월14일 새벽 다른 마을 정 아무개씨(44·여) 집에 침입해 강간하려다 정씨가 반항하자 경운기 시동 작동기로 내리쳐 죽였다. 그는 피해자의 딸 박 아무개양의 머리를 흉기로 내리쳐 실신시킨 뒤 강간하고 전치 6주의 좌상을 입혔다. 초범으로 구속된 유씨는 1993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고, 천주교에 귀의해 서울구치소에서 추수감사절 세례식 때 세례를 받았다. 1997년 12월30일 교도관들이 양쪽에서 팔장을 끼고 들어올 때 사형장 입구에서부터 찬송가를 불렀다. 심문관이 마지막 유언을 묻자 “내 사체를 병원에 기증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고 구원 얻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선한 모습으로 변해서 그가 가는 것을 보고 입회 검사가 눈물을 흘렸다. 나도 울었고 많은 입회자가 울었다. 

   
ⓒ연합뉴스
1995년 11월2일 교수형이 집행된 지존파 일당이 범행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 지존파 6명은 모두 사형당했다.

지존파 두목 김기환(27) 등 일당 6명의 최후

1993년 4월 김기환 등 지존파 일당 6명이 현대백화점 고객 명단을 입수해 범행 대상으로 삼고 그해 7월 길 가던 한 여인을 목 졸라 살해하고, 8월에는 조직을 이탈한 송봉은을 죽였다. 1994년 9월8일 이종원씨와 이 아무개 여인을 납치해 이종원씨를 살해하고, 사흘 뒤 소윤오씨와 그의 부인을 납치해 죽였다. 이 사건으로 세상은 떠들썩했으며 1994년 9월21일 지존파 일당이 체포돼 6명 전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두목 김기환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저는 집이 너무나 가난해 크레파스를 살 돈이 없었습니다”라며 가난이 뼛속까지 사무쳐서 사회를 향해 분노를 쏟았을 뿐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법무부는 사회기강 확립을 명분으로 1995년 11월2일 신속하게 지존파 일당 6명을 전원 사형 집행했다.

지존파는 사형 확정 뒤 워낙 종교를 강하게 거부해서 전도하기 힘들었으나 인육을 먹었다는 김현양이 먼저 예수를 받아들이고 전도에 나서자 강동은·강문섭·백병옥 등 4명은 기독교로, 김기환·문상록은 천주교에 귀의했다. 사형 집행일 유언 시간에 두목 김기환은 “죄인이 할 말은 없으나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은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지존파 6명은 장기를 기증할 뜻을 보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사형이 예정보다 신속히 진행되는 바람에 필요한 절차를 밟지 못해서였다.

   
ⓒ연합뉴스
1995년 사형 집행된 부녀자 연쇄 납치범 온보현.
부녀자 연쇄 납치 살인범 온보현(38)
1994년 9월 택시 번호판을 위조해 전국을 돌며 부녀자 6명을 납치한 온보현은, 그 중 2명을 살해해 세상을 경악시켰다. 아버지의 외도로 어머니가 자살한 후 가정이 깨지는 바람에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해 우울증 상태에서 가출한 결과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법원은 ‘과대망상과 자기과시욕에 빠진 살인마의 범죄일 뿐’이라며 사형을 확정했다. 1995년 11월2일 사형장에 끌려온 온보현은 마지막 유언으로 “제 몸을 실험용으로 필요한 데 쓰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나는 최후 예배를 인도했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온보현도 신앙으로 변화된 상태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차분했다. 온보현이 교수대로 끌려들어가자 휘장이 닫히고 ‘퉁’ 소리와 함께 처형됐다. 그가 죽어가는 순간 우리는 찬송가 ‘만세반석 열린곳에’를 불렀다. 오전 10시5분에 집행되어 12분 뒤 절명했다.

밥 한 그릇 때문에 살인 저지른 김삼중(37)
1985년 11월23일 밤, 김삼중은 강간을 하고 도망가다가 민가에 침입해 밥을 안 준다는 이유로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인 죄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1992년 12월29일 사형 집행일에 서울구치소장이 김삼중에게 유언을 하라고 하자 할 말이 있다며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소장은 수갑을 풀어주도록 배려했다. “가난해서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국선 변호사는 형식적으로 얼굴만 내밉니다. 검사님께 부탁합니다. (사건 기록을) 피해자 위주로 허위 작성하는 수가 있습니다. 작은 사건을 크게 만들 수 있고 가해자에게 인색합니다. 공직에서 뇌물 받아먹고 돈과 배경 없으면 처벌당하는 것을 재검토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우게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소장은 직원에게 담배를 건네주라고 지시했다. 김삼중은 한 모금 빨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생명에 대한 애착, 그 시간만이라도 생명을 연장해보려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는 반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교수대로 향했다.

강원도 홍천 강도 살인범 서채택(48)
서채택은 1986년 10월 강원도 홍천에서 김태윤씨를 상대로 강도 살인을 저질러 1987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1994년 10월6일 사형이 집행됐다. 서울구치소장의 인정신문 시간에 “내 몸 전체를 기증하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겨 실행됐다. 불교에 귀의한 서채택은 죽기 전 불교식 삼배를 했다. 구치소장이 마지막으로 국가에 할 말이 없냐고 묻자 “나는 한겨레신문만 봅니다. 가장 정직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가족에게 죄송합니다. 저를 마지막으로 앞으로 두 번 다시 사형 집행이 없기를 바랍니다”라며 최후 유언을 남겼다. 서채택이 강도 살인한 피해자 김태윤씨의 아내 유 아무개씨는 남편을 잃고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겪었지만 기독교 신자가 된 후 용서를 실천했다. 그녀는 서채택이 사형당하기 전 법원에  “예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서채택을 사형시키기보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용서하여 평생 무기수로 속죄의 삶을 살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탄원서를 써 올렸지만 허사가 되고 말았다.

연쇄 살인과 같은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는 명백히 드러난 혐의 자체를 부인하는 일은 없지만 일부 살인 강도 사건 사형수 가운데는 무죄를 주장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안성농협 살인강도 사건 범인으로 체포돼 1997년 12월30일 사형이 집행된 최은수가 대표적이다. 경찰관이던 그는 당시 진범이 따로 있다며 재심신청을 했고, 이를 정밀 검토한 서울지방변호사회는 법률구조사업으로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한 번 사형수는 영원한 사형수였다. 끝내 사형이 집행되자 그는 교수대 앞에서 “하나님, 이 사건을 오판한 판사와 검사, 위증자의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내연녀의 청부를 받고 그녀의 남편과 자녀를 목 졸라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오휘웅씨도 비슷한 경우다. 1979년 8월 사형이 집행된 오씨는 교수대 앞에서 “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이 사실은 알고 계십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는 수형 생활 내내 “어차피 인간은 한번 갈 목숨, 좀더 빨리 가는 것뿐이지만 누명을 쓰고 가는 게 분하다”라고 말하다가 집행일을 맞았다. 

재판도 인간이 하는 일이라서 아무리 신중을 기한다 하더라도 오판의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수는 없다. 사형 집행은 오판을 시정할 기회를 영구 박탈하는 셈이다. 사실 그동안 1심이나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가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사건도 적잖았고, 하급심 진행 도중 진범이 잡혀 억울한 살인 누명을 벗은 사건도 있었다는 점에서 사형을 집행해버리는 제도 자체에 대한 근원적 문제 제기도 나온다.

인혁당 사건이나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진보당 조봉암 사건 등 과거의 시국사건 피의자가 억울하게 사형됐지만 일반 사형수 가운데 억울함을 푼 예는 단 한 건도 없다. 그것은 그러한 사형이 없어서라기보다 억울한 사형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증거가 사형수 본인일 경우 그를 죽이는 것은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장인 이상혁 변호사는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하는 인간이 오판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하며 오판으로 사형이 집행되면 진범이 체포돼도 구제할 방법이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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