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이 몇 천 명 온다 해쌌는데 우리 할머니들, 겁도 없지요?” 한옥순씨(62)가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한씨처럼 ‘765kV OUT’이라고 적힌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주민 30여 명이 한목소리로 “예”를 외쳤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할머니·할아버지가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저번에는 웃통을 벗었는데 이제는 홀딱 벗읍시더”라는 대목에서는 웃음소리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9월10일 낮,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평밭마을. 송전탑 부지 29번 현장에 765kV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날 할머니들은 큰 솥에 쇠고기 국을 끓이고 밥을 퍼 날랐다. 가요 ‘황진이’를 개사한 ‘765 송전탑 송’을 부르며 주민들이 어깨를 들썩이자 흥겨운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오가는 얘기는 잔치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주민들은 이날 “몸과 마음을 다지기 위해” 단합대회를 열었다. 이미 추석 연휴 직후 한국전력이 송전탑 공사를 강행한다는 얘기가 파다한 까닭이었다(이튿날인 9월11일, 국무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밀양시 단장면을 찾은 정홍원 총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공사 강행을 기정사실화했다).

ⓒ시사IN 신선영9월10일 밀양시청 앞에서 주민들이 2인1조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북면뿐 아니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단장·부북·산외·상동 등 4개 면 주민들은 ‘이번이 마지막 전쟁’이라는 정서를 공유했다. 올해 5월20일 공사가 재개됐을 때 밀양의 ‘할매’들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제 몸을 포클레인에 묶어가며 저항했다. 9일 만에 공사가 잠정 중단된 뒤 구성된 전문가협의체가 40일간 대안을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8년째 계속된 정부·한전과의 갈등으로 “몸 덩어리 전체에 분노가 가득 찬” 할머니들은 “목숨을 내놨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추석 후 작업한다. 과격하게 싸우지 마라”

주민들은 밀양시청이 송전탑 공사 추진 뜻을 분명히 한 8월께부터 ‘인해전술’식의 설득 작업이 시작됐다고 입을 모았다. 7월25일 엄용수 밀양시장(새누리당)이 기자회견을 열어 송전탑 건설 사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힌 뒤, 밀양시청은 △보상팀 △홍보팀 △행정팀 등 3개 팀으로 구성된 특별대책본부를 발족하고 반대하는 주민 설득에 직접 나섰다.

‘765kV 송전선로 대책 마을별 홍보반’을 꾸려 5·6급 공무원 133명을 8월19일부터 4개 면 27개 마을에 파견한 게 대표적이다. 현재는 합의가 진행 중인 8개 마을을 제외한 19개 마을에 파견하고 있다고 밀양시청 조영진 경제투자과장은 밝혔다. 조 과장은 “예산의 80%를 중앙정부에 의존하고 있어 국책사업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부담이 크다. 다른 지역은 합의했는데 밀양만 갈등이 오래되다 보니 ‘밀양 사람들은 별나다’는 이야기가 자꾸 나오고 지역 브랜드에도 영향이 있다. 버텨서 될 사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는 보상에도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는 5개 면 주민대책위원회 10명을 포함해, 한전·밀양시·경남도청·산업부 직원 등 총 21명으로 구성된 ‘밀양송전탑 갈등해소 특별지원협의회’(위원장 목진휴 국민대 교수)가 8월5일 출범해 회의를 거듭한 끝에 9월11일 보상안을 확정했다. 전체 보상금 185억원 가운데 40%(74억원)는 개별 세대에 직접 지급하고 나머지는 마을 숙원사업에 사용한다는 내용이다. 송전탑 경과지 4개 면 30개 마을 1800여 가구가 약 400만원씩의 보상금을 받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 쪽 주민들은 이 같은 밀양시의 행동이 오히려 갈등을 키우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반대 주민들이 돌아가며 매일 밀양시청 앞에서 ‘출근 시간 1인 시위’를 하는 이유다. 9월10일 아침 밀양시청 정문과 서문 앞에서는 각각 상동면 고답마을에서 온 할머니 2명과 할아버지 2명이 시위를 했다. 밀양시청 정문 앞에서 만난 여순필씨(66)는 ‘밀양시는 한전의 하수인 노릇을 즉각 중단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밀양에서 나고 자란 여씨는 30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살면서 감나무·콩·들깨 농사를 한다고 했다. 여씨는 연방 “클났다. 사람 몬살게 맨든다. 촌사람들은 추석 쉬고 억수로 바쁜데…”라고 공사가 시작될 것을 걱정했다. 시가 공사 강행을 옹호하고 나선 데 대해서는 “맴이 아프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시사IN 신선영9월10일 밀양시 부북면에서 송전탑 공사에 반대하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집집마다 방문하는 건 밀양시청 공무원만이 아니다. 경찰들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9월10일 산외면 보라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만난 한 경찰 관계자는 “여론 정찰 업무를 하러 왔다”라고 말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30~40대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남성 2명이었다. 경찰은 ‘추석이 지나고 (송전탑) 작업할 거다. 너무 과격하게 싸우지 마시라’는 얘기를 했다고 다수의 주민들은 전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다음 싸움에서 ‘앞에 나서는 이들’이 사법처리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지난 8월26일 김정회(41) 단장면 동화전마을 대책위원장이 업무방해 등 혐의로 체포돼 구속영장이 신청됐다가 풀려난 사례를 주민들은 ‘기선제압용’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한전은 반대 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 등 26명에 대해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도 한 상태다.

8년째 이어지는 밀양 송전탑 갈등이 결국 ‘공사 강행’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으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또다시 남기는 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밀양이 받은 가장 큰 상처는 2012년 1월16일 용역들의 공사 강행에 맞서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이치우씨(당시 74세)의 죽음이다. 고 이치우씨의 동생 이상우씨(73)는 요즘도 하루에 서너 번씩 형이 죽은 보라교 앞을 지난다고 했다. 이씨는 형이 분신한 아스팔트 도로 위의 거뭇한 자국을 바라보며 “암만 씻어도 안 씻겨, 기름이”라고 중얼거렸다. “새까맣게 타서 살갗이 다 익은” 형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정신이 이상해진다”라고도 했다.

반대 주민들에게는 이치우씨의 죽음 외에도 정부와 한전의 거짓말, 현장 인부들의 욕설과 조롱이 뼛속 깊이 각인된 듯했다. 2013년 6월8일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이 4개 마을 주민 79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고위험군이 69.6%에 달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트라우마’를 뒷받침한다. “한전만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라는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공사현장 옆 움막에서 세 번째 추석을 보낼 예정이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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