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 도쿄는 33℃에 이르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이날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히비야 광장은 ‘잘가 원전 1000만명 서명 시민모임’이 주최한 ‘잘가 원전’ 강연회에 참가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선착순 입장인지라 사람들은 연방 손 부채질을 하며 줄을 섰다. 오후 1시에 시작하는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세 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렸다는 호게쓰 지카코 씨는 “오에 겐자부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와 고이데 히로아키 교토 대학 원자로실험실 교수의 강연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서 참석했다”라고 말했다. 탈원전을 둘러싸고 서슴없이 발언해온 여배우 기우치 미도리, 르포 기자 가마타 사토시도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각자 만든 ‘원전 재가동 반대’ ‘원전 필요 없어’ 같은 선전물을 나눠주었다. 선전물을 나누는 이들이 곧 강연 참석자였다. 특이한 점은 2050명 참가자 가운데 99%가 노년층이었다는 것이다. 강연회가 끝난 오후 5시, 총리 관저로 향하는 길에 경제산업부 앞에 위치한 천막 농성장을 지나쳤다. 722일째 ‘원전은 필요 없다’는 거리 행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총리 관저 맞은편에서 열린 시위는 생각보다 조촐했다. 일렬로 한두 줄씩 서서 ‘재가동 반대’를 두 시간가량 외치는 ‘일본식’ 시위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9월1일 ‘잘가 원전’ 강연회 참가자들이 일본 총리관저 앞에서 원전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9월1일 ‘잘가 원전’ 강연회 참가자들이 일본 총리관저 앞에서 원전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고농도 오염수 누출, 단신 처리하는 언론

작가 오에 겐자부로도 나섰지만 언론 보도는 많지 않았다. 전국 언론사 가운데 강연회를 보도한 언론사는 독립언론 IWJ와 〈도쿄 신문〉 〈아사히 신문〉이 전부였다. 직장인 사쿠라 이와미 씨(26)는 “정부와 언론을 믿지 않는다. 보도가 안 되니까 원전 사고가 난 사실을 점점 잊어버린다는 점이 문제다”라고 말했다.

9월3일, 도쿄 전력이 후쿠시마 제1원전 탱크에서 누출된 방사선 양이 시간당 최대 2200 m㏜(밀리시버트)라고 발표했다. 이 내용은 이날 밤 NHK에서 10초가량 단신으로 보도됐다. 앵커는 “오염수가 새어나온다(漏れる·모레루)”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오염수 누출을 표현할 때 쓰는 ‘방출’과는 다른 어조다.

같은 시각, TBS에서도 고농도 오염수 누출 보도를 한 줄 자막으로 처리했다. 곧이어 도호쿠 지방의 관광지와 음식점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일본 아이돌 그룹 도키오는 후쿠시마산 복숭아와 오이를 먹었다. ‘맛있는 후쿠시마, 할 수 있어요’ ‘후쿠시마는 건강합니다’라는 캠페인이었다.

오랜만에 나선 시위와 짤막한 뉴스만 없었다면, 후쿠시마 원전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났으며 현재까지 방사능 오염수 누출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취재 중에 만난 도쿄 시민들은 방사능 공포에 대해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했다. “개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공동체와 단체에 의존하는 일본인 정서상, 시위가 일어나는 일 자체가 보기 드문 광경이다”라고 한 시민은 말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엄마’는 소수

사쿠라 씨는 한때 방사능에 오염된 식품을 먹지 않으려 애썼다. 지난 3월, 그녀는 큰언니의 아들인 세 조카를 데리고 방사성 물질 검출 검사를 하기도 했다. 내부 피폭검사 비용은 1인당 3000엔(약 3만2000원), 당시 50% 할인된 가격이었다. 체내의 세슘 피폭 정도를 알려준 검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사쿠라 씨나 그녀의 언니보다 세 조카의 오염도가 2~3배 높았던 것이다.

관성은 무서웠다. 언니는 “이민을 갈 수도 없고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데, 먹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맛있게 먹으면서 행복해지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사쿠라 씨도 조금씩 무덤덤해졌다. 그는 “친구들과 방사능 오염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하지 않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기자가 외국인이라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 같다. 일본인 친구들 사이에서는 결코 대화하지 않는 주제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이 조금은 불안했다. 일본에서는 음식점이 원산지를 표시할 의무가 없다. 신주쿠에서 먹은 돈가스와 덮밥 등의 재료는 주로 양배추와 돼지고기, 쌀밥 따위였다. 점원에게 양배추와 쌀의 원산지를 물었다. 이들의 대답은 “국내산”이었다. 한 점원은 당황해하며 “일본인은 이렇게 묻지 않아서요”라고 덧붙였다. 음식을 주문하던 한 남성은 알면 먹기가 꺼려질 테니 차라리 신경 쓰지 않는 게 마음 편하다고 했다.

일부러 후쿠시마 현이 포함된 도호쿠 지역(후쿠시마·아오모리·이와테·미야기·야마가타·아키타) 식품을 구매하는 사람도 있었다. ‘잘가 원전’ 강연회에서 만난 요네카와 후미코 씨(76)는 후쿠시마의 고등학생들이 ‘우리를 버리지 말아달라’며 캠페인하는 모습을 본 뒤 적극적으로 후쿠시마산 식품을 구입한다고 말했다. 일본 특유의 돕고 돕는 ‘오모이야리’ 정신(우리말로 ‘배려’ ‘온정’ 같은 어감으로 해석된다)에 따라,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소비하는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9월3일 신주쿠의 한 마트에서 후쿠자키 씨가 후쿠시마산 배를 살펴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9월3일 신주쿠의 한 마트에서 후쿠자키 씨가 후쿠시마산 배를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국민의 마음을 ‘빌린’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산 브랜드를 단 제품에 ‘후쿠시마 힘내!’ ‘피해 지역 응원’ 같은 문구를 달아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모이야리 문화에서도 방사능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60대인 호게쓰 지카코 씨는 타협하기로 했다. “가임기 여성인 딸에게는 생협에서 구입한 식품을 주고, 남편과 내가 먹는 음식은 후쿠시마 식품을 쓴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현민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 아닌 데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 애쓰는데 모른 체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먹는다’는 것이다.

소수이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엄마’, 특히 어린아이를 둔 주부 가운데는 적극적인 소신파도 생겨나고 있다. 9월3일 도쿄 신주쿠 오제키 마트. 주부 후쿠자키 아카네 씨(30)는 9월3일, 저녁 찬거리를 고르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장바구니에는 음식 재료를 6가지밖에 담지 못했다. 원산지를 꼼꼼히 살핀 까닭이다. 웬만하면 마트에 오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간사이 지방에서 키운 채소를 배송해 먹기 때문이다. 2011년 3월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생긴 변화다.

마트 입구에는 후쿠시마산이라고 적힌 배가 하나에 100엔(약 1130원)에 판매 중이었다. 가격 표시 오른쪽에는 ‘정말 맛있잖아~’라고 광고하는 점원의 얼굴 사진이 부착돼 있다. 노인들은 비교적 저렴한 후쿠시마산 배를 거리낌 없이 사갔다. 후쿠시마산 복숭아도 판매되고 있었다. 네 살, 여섯 살짜리 두 아이의 엄마인 후쿠자키 씨는 잠시 쳐다보기만 했다.

원전 사고 이후에는 물에서 재배하는 채소를 끊었다. 이바라키산 연근, 지바산 미나리를 지나쳤다. 즐겨 먹던 채소이지만, 깨끗한 물에서 자랐는지 알 수 없었다. 후쿠자키 씨는 도호쿠 지방을 비롯해 후쿠시마와 맞닿은 이바라키·군마·도치기·지바·도쿄 현 일부가 오염됐을 거라고 판단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9월5일 쓰키지 시장 내 초밥집 앞에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9월5일 쓰키지 시장 내 초밥집 앞에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날 고른 건 후쿠시마로부터 비교적 먼 남쪽에 위치한 지역의 식품들이었다. 효고산 양파, 도쿠시마에서 난 고구마, 그리고 ‘방사능 물질 검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라는 QR 코드를 표시한 콩나물까지. 이따금 네덜란드산과 이와테산 당근 가운데 선택해야 할 일이 생기면, 더없이 괴롭다. 농약과 방사능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아찔해져서다.

도쿄 도시마에 사는 네 아이의 엄마 이토 에미코 씨(50)는 중학생·초등학생인 아이가 학교에서 먹는 급식을 간과할 수 없었다. 정부는 급식에 대한 검사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도시마 구에서 2011년 10월∼2012년 3월 한 달에 한 번씩 여섯 차례 방사능 물질 검출검사를 시행했다. 그 이후에는 예산이 모자란다며 아예 검사를 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진행했던 검사에서는 만들어진 음식을 그대로 검출기에 돌렸다. 닭고기, 로스햄, 피망, 가다랑어, 베이컨, 콩나물 같은 재료를 따로 검사하지 않고 완성된 스파게티를 통째로 넣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얼마나 검출됐는지 알 수 없다. 검사 결과는 ‘모두 불검출’. 도시마 구 홈페이지에는 ‘불검출이라는 뜻은 기준치 미만이라는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토 씨는 막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한 가지 다짐했다. 학교에서 주는 우유와 물을 먹이지 않겠다는 것. 도시마 구가 배급한 학교 급식용 우유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지만 기준치 이하라는 이유로 유통됐다. 수돗물은 곧 식수였다. 하지만 ‘선언’을 함께할 학부모는 없었다. 여러 번에 걸쳐 대화를 나눈 끝에 한 학부모를 설득해 함께 교장 선생님께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구’에서 결정할 사안이라며 대답을 피했다. “다른 학생들이 위화감을 느낀다”라는 게 이유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유를 먹지 않는 것, 물통을 지참하는 걸 ‘개인의 자유’로 조율할 수 있었다. 이토 씨는 본인을 ‘소수자’라고 표현했다.

수산물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은 수산시장과 항구에서 ‘조용히’ 확인할 수 있었다. 9월5일 목요일 오전 6시, 도쿄 최대 어시장인 쓰키지 수산시장은 인산인해였다. 평일인데도 스시(초밥)집 앞에서 100여 명이 줄을 선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방사능 검사 강화한 수산물 매출 증가

이곳은 새벽 3시부터 전국의 생선·초밥 가게 주인이 몰려들어 신선한 넙치·연어·농어 등 생선을 대량으로 사간다. 길이 1m는 거뜬히 넘는 참치에는 ‘일본산’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줄 선 행렬만 보면 이곳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누출’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했다. 그러나 한 상인은 “활기를 되찾고 있지만, 후쿠시마 항에서 주로 잡히는 가다랑어와 꽁치는 다른 현의 상품과 비교해 3분의 1 수준으로 물량이 떨어졌다”라고 귀띔했다.

도쿄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3시간 정도 떨어진 지바 현 지쿠라 항에는 조업을 마친 배 20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곳에 위치한 스즈이치 수산은 자체에서 방사능 검사를 한다. 한 달에 한 번, 해저층을 포함해(조개·해초류·농어·넙치 등은 해저에 살아서 특정 지역의 오염 정도를 확인할 때 검사한다) 방사성 물질을 검출한다. 게르마늄 측정기를 이용해 세슘의 경우 1Bq(베크렐)/㎏ 이하의 상품만 취급한다. 일본 정부의 기준치가 100Bq/㎏인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는 셈이다.

자체 검사를 실시하고, 정보를 홈페이지에 공유하면서 수입은 2배가량 늘었다. 오노 노보루 전무이사는 싱싱한 돌돔·농어를 들어 보이며 곧 생협으로 배송될 예정이라고 했다. “다섯 살 딸아이가 먹지 못하는 생선은 절대 팔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했다. “전 지역 마트에서 판매되는 생선에서 천천히 조용히, 후쿠시마산이 사라졌다.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있다는 증거다.”

최근에는 겨울의 별미인 어묵·호빵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식은 피하라는 얘기가 돈다. 일본 정부는 방사능 오염수 문제를 대하듯 먹을거리에 대해서도 안전하다고만 강조한다. 망각하기 시작하면서 오염은 점차 익숙해지고, 그러는 사이 불안은 무뎌진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대책은 그저 회피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상황이다. 일본 시민방사능감시센터 아오키 가즈마사 부이사장은 “3·11의 후쿠시마를 기억하고 있다면, 도호쿠 지방 음식을 안 먹는 수밖에 없다. 기피하거나 모른 체만 할 게 아니라, 함께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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