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에 비유하자면, 2013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근래 보기 드문 흉년이었다. 예능에서는 눈길을 끌 만한 새로운 포맷을 찾아보기 어려운 가뭄 속에 기존 인기 프로그램들로 근근이 버텨가는 형국이다. 가령 〈나는 가수다〉나 〈SNL〉이 처음 전파를 탈 무렵의 폭발적인 호응에 비슷하게라도 다가간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다. 그보다 더 참혹한 건 시사 교양이다. 안팎으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분투하고 있을 제작진의 노고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지만, 두고두고 수작으로 꼽힐 만한 다큐멘터리나 사회적인 이슈 파이팅에 성공한 대형 탐사보도가 출현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도, 이를테면 지난해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나 〈추적자〉에 비견할 만한 화제작이 없었다. 그래서 ‘TV 읽기’ 지면이 어쩌면 맥 빠진 구색 맞추기에 머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변명하고 싶다).

ⓒKBS <황금의 제국> 화면캡처<황금의 제국>(위)은 <모래시계>에 능가할 만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 끝나고부터 TV 안 봐요”

올해 초의 에피소드가 실마리가 될까. ‘땡전 뉴스’의 악몽을 기억하던 많은 이들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뉴스 화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대통령보다 대변인의 얼굴을 더 자주 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기괴하도록 낯선 광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할 양이면 거의 예외 없이 마주치던 첫 반응이 이랬다. “그래요? 대통령 선거 끝나고부터 텔레비전을 안 봐서요. 통 몰랐어요. 정말 그렇단 말예요?”
사실 순수하게 프로그램의 질로만 보자면, 올해가 특별히 다른 해보다 뒤떨어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언제든 있기 마련인 눈살 찌푸리게 하는 타작이나 졸작이 없지는 않았지만, 꼼꼼히 짚어보면 평년작 정도는 유지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눈이 번쩍 뜨이는 ‘대박’이 없었던 것뿐이다. 어찌 보면 시청자들의 방송 수용 태도에서 활력과 역동성이 전례 없이 위축되었다는 새로운 조건에서, 방송이 이런 분위기를 뒤집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KBS <추적자> 화면캡처지난해 <추적자>(위)의 박경수 작가는 “이건 워밍업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변화의 조짐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가시적인 사례는, 역시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지난해 〈추적자〉가 한창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를 무렵, 박경수 작가는 “이건 워밍업이다. 더 큰 걸 준비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한껏 기대를 갖게 했다. 그리고 〈황금의 제국〉의 뚜껑이 열렸을 때 그 호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히 〈황금의 제국〉은 〈추적자〉보다 스케일도 더 크고 긴장감도 더 높고 무엇보다 메시지의 무게와 깊이가 한층 더 확보된 문제작이다. 과장이 허락된다면 이제는 전설이 된 〈모래시계〉보다도 한 수 위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흥행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추적자〉에는 있는데 〈황금의 제국〉에는 없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다시, 이것은 드라마의 가시적 완성도와는 무관해 보인다. 문제의 핵심은 드라마 바깥에 있는 것이다. 만일 지금이 아닌 다른 어느 시기였어도 이 드라마가 이토록 보잘것없는 성적에 머물렀을까. 굳이 제작진이 놓친 것이 있다면, 거창하게 말해서 ‘시대정신과의 교호(交好)’다. 요컨대 지금 이 시점의 대중은 그만큼의 스케일을 마음 편히 조망할, 그만큼의 긴장감을 기꺼이 즐길, 그만큼의 무게와 깊이를 처연하게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기엔 그 어느 때보다 꽁꽁 닫혀 있고 너무나 지쳐 있다. 한마디로 〈황금의 제국〉에는 ‘신파’가 없다. 그 그림자조차 어른거리지 않는다. 아이러니하지만, 드라마로서의 성취가 오히려 흥행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렇다고 값싼 위로가 능사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낡아빠진 ‘신파’로 버무려진 ‘힐링 코드’조차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것쯤은 대중이 더 잘 안다.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안 되는 막막한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힐링’이 시대정신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대중을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파악한 소치다. 위로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당연히 거짓이겠으나, 언제까지나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이 시대와 조응하는 새로운 트렌드는 활력과 역동성의 불씨를 되살려낼 수 있는 실마리를 건드리는 지점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것은 1970년대식 “잘 살아보세”의 재탕이어서도 안 될 것이고,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만연한 ‘희망 고문’의 거짓 선동에 머물러서도 곤란할 것이다. 옛것은 무너졌으되 새것은 오지 않았으니, ‘이성의 비관’과 ‘의지의 낙관’만이 길을 열어줄 것이다.
※ ‘TV 읽기’ 연재는 이번 호가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변정수·유선주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변정수 (미디어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