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학생이 돌고 도는 학교
  • 김은남 기자
  • 호수 313
  • 승인 2013.09.2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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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학교’는 수업료도 강사료도 없다. 누구나 교사가 될 수 있고, 수업마다 교사와 학생의 자리바꿈이 자주 일어난다. 배움의 즐거움을 깨닫게 하는 ‘시민주도형 평생학습 모델’이다.
“나는 늙지 않는 학생이다.”

조경옥씨(74)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30년 넘게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명예퇴직한 것이 2000년대 초. 그 뒤로 조씨는 온갖 것을 배우고 다녔다. 요리, 사교댄스는 기본이고 미용사 자격증까지 땄다. 그러나 학원이나 평생교육원을 순회하며 이런 것들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소속감이 사라져서 그런가 보다’ 싶어 자원봉사나 자동차 보험 판매원을 해봐도 허전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것이 ‘지혜로운학교’다. ‘누구나 가르치고 누구나 배우는 학교’, 그래서 교사가 학생이 되기도 하고 학생이 교사가 되기도 한다는 이 독특한 학교를 알게 된 뒤 조씨는 “삶의 질이 달라졌다”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경로당 출입하기에는 어정쩡한 나이’에 노인복지관 프로그램도 맘에 맞지 않아 산과 도서관을 오가며 방황 중이었다는 홍순경씨는 지혜로운학교를 알게 된 뒤 ‘어둠 속을 거닐다 작은 불빛을 발견한 심정’이었다고 말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윤무영〈/font〉〈/div〉지혜로운학교 2013년 가을학기를 여는 오픈강좌가 9월3일 서울시민청에서 열렸다.

도대체 어떤 학교기에? 지혜로운학교는 희망제작소의 은퇴자 교육 프로그램인 ‘행복설계 아카데미’ 수료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이 중 몇몇이 영국의 U3A(University of the Third Age) 모델에 매료된 것이 계기가 됐다. 사회학자들은 태어나 성장하는 청년기(1기),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중장년기(2기)와 구분해 사회와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 자아실현에 집중하는 그 이후의 시기를 인생 3기라 구분하는데, U3A란 말 그대로 인생 3기를 맞은 이들이 만든 학교다. 본래 프랑스에서 시작됐다가 1980년대 초 영국에 이식돼 큰 성공을 거뒀다.

강사는 전문가가 아니라 코디네이터

영국 U3A의 경우 연중 개설되는 과목만 160여 개, 수강자는 1600명을 웃돈다. 이곳을 두 차례 견학했다는 이경희 중앙대 명예교수(65)는 “당신의 지식이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다른 누군가의 지식 또한 당신에게 필요하다. 그러니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모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배운다는 이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해 시민들이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학교를 만들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학교를 우리도 한번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실행이었다. 돈 없고 조직 없는 시니어들이 일을 저지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범 삼아 개설한 사진교실이 괜찮은 호응을 얻자 용기가 생겼다. 그 결과 2011년 6월, 한국판 U3A가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지혜로운학교는 조금씩 학교 꼴을 갖춰가고 있다. 일단 봄·가을 학기 체제가 자리를 잡았고, 강좌 과목도 개설 당시 5개에서 지금은 학기당 20개 안팎으로 늘었다. 동가식서가숙 식으로 옮겨다녔던 강의실 또한 사정이 나아졌다. 여전히 빈대 붙는 처지이긴 하지만 지금은 삼청동·서초동·시민청(서울시 청사 내) 3곳을 고정으로 빌려 쓴다. 올해는 서울시 평생교육 비영리 민간단체로 정식 등록을 마치기도 했다.

이 학교의 온라인 캠퍼스라 할 인터넷 카페(cafe.naver.com/openuniversity)에 들르면 올 가을학기에 개설하는 강좌 20여 개의 목록을 열람할 수 있다. 문화예술·인문교양·외국어·건강실용강좌 등으로 카테고리가 구분돼 있고, 강좌별로 클릭하면 커리큘럼 및 강사 소개와 강의 일정도 나와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 대학이나 학원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수상쩍은 것들이 눈에 띈다. 일단 수강료가 없다. 수업을 받는 사람도 돈을 안 내고, 강의하는 사람도 돈을 받지 않는다. 이 학교는 100% 재능기부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다만 학교에 입학하려는 사람은 연회비 10만원을 내야 한다. 연회비를 내면 모든 과목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윤무영〈/font〉〈/div〉지난 학기 ‘자유로운 데일리 드로잉’ 강좌를 수강한 학생들이 마련한 작품 전시회.

‘이래서야 좋은 강사를 확보할 수 있을까?’ 싶은데, 강사들의 면면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전·현직 대학교수에, 유학파에, 기업 강의를 주로 다니는 전문 강사만도 여럿이다. 리더십 강의가 특장인 이창준 구루피플스 대표(47)도 이 학교에서는 무료로 강의를 진행한다. “돈을 받지 않으니 더 홀가분하고, 뭐랄까, 기능적인 지식 전달에 집중하기보다는 사람에 더 집중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강의에 몰입하는 즐거움이 크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도 공짜 강의를 계속하기에는 기회비용이 너무 큰 것 아니냐고? 정 아쉽다 싶으면 자신도 다른 강의를 들으면 된다. 이 대표의 경우 지난 학기 ‘자유로운 데일리 드로잉 여행’을 수강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뭔가를 그려보고픈 욕구가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지라 주말마다 8주 동안 진행된 강의를 거의 빠지지 않고 들었다. 종강하고는 수강생 10명과 함께 서초동 강의장에서 작품 전시회도 열었다.

이렇게 교사가 학생이 되고, 학생이 다시 교사가 되기도 하는 자리바꿈이 지혜로운학교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꼭 뭔가에 정통해야만 교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데일리 드로잉 강의를 개설한 허수진씨(24)는 사회복지를 전공 중인 대학생이다. 자신도 취미로 그림을 배운 정도이지만 “가르치면서 함께 배우면 된다”라는 지인의 꼬임에 빠져 덜컥 강좌를 개설했다. 지혜로운학교 교장을 맡은 김명중씨(73)도 마찬가지다. 성당 성가대에서 접한 라틴어가 궁금해 혼자 끙끙대던 중 ‘함께 공부하면 낫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로 ‘라틴어 함께 배우기’ 강좌를 개설했다. 그렇게 시작된 강좌가 벌써 2년째다. 그새 그의 라틴어 실력도 부쩍 늘었다. 명색이 강사인데 수강생보다는 한 발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파고든 결과다.

청출어람형 수강생이 등장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없다. 지난해 ‘아파트에서 농사꾼 되기’라는 강좌를 개설했던 이경희 교수는 “뚜껑을 열고 보니 나보다 농사에 훨씬 정통한 학생이 많더라”며 웃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그녀가 이런 강좌를 연 것은 시골에서 5년간 텃밭을 일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농업지도사 자격증도 땄다. 그럼에도 진짜 고수는 따로 있었던 것. “개중에는 지역사회에 텃밭 농사를 보급하고 싶어 일부러 수업을 듣는다는 분도 있었다. 나중에는 그분들과 공동 강의를 했다”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윤무영〈/font〉〈/div〉지혜로운학교 운영위원과 20대 서포터스 단원들이 손을 맞잡았다.

학기 말이면 강사의 ‘실력’을 평가해 다음 학기 임용 여부를 결정하는 대학이나 학원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혜로운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아니, 때로는 오히려 장려되기도 한다. “영국 U3A에서는 강사를 ‘리더’나 ‘코디네이터’라 부른다. 가르치는 것보다 모임을 조직하고 이끌어가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라고 이경희 교수는 말했다.

이는 ‘배움’과 ‘나눔’을 중시하는 지혜로운학교 특유의 협동학습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지혜로운학교 최연소 회원 그룹에 속하는 김승운씨(23·대학생)는 이곳에서 책 읽기, 조선왕릉 답사 등 수업을 들으면서 “함께 배우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껴보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입시교육·경쟁교육에 길들여진 평범한 20대였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원하는 목표를 성취할 것, 이것이 그가 아는 공부법이었다. 그러나 시험도 없고 경쟁도 없는 이곳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다 보니 배움이 즐거워지고 배움의 질 또한 오히려 깊어지더라는 것.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가 만나 배움의 결을 풍성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영국 U3A와 달리 지혜로운학교는 40대 이하가 제법 눈에 띈다. 지난 학기 책 읽기 강좌를 수강한 선연씨(39)는 “같은 책을 읽고도 연령대에 따라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가 너무 달라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배척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는 것이다. 최근 지혜로운학교에는 20대 10여 명으로 이뤄진 서포터스 그룹도 출범했다. 이들은 인터넷이나 SNS에 어두운 시니어들을 위해 홍보나 행정업무 등을 돕게 된다. ‘세대 전쟁’이라는 살벌한 용어까지 등장한 판에 지혜로운학교에서는 세대 간 연대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개교 2년을 넘긴 지혜로운학교의 앞날은 아직 순탄치 못하다. 수업료 없이 운영되는 학교인 만큼 자원봉사자들의 참여와 열의가 학교 운영을 원활하게 만드는 관건인데 이를 지속적으로 모아내기가 쉽지 않다. 김명중 교장은 “사회복지망이 부실해서인지 한국 시니어들은 여유가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이 계층이 뭔가를 배우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데 관심을 쏟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나 동창회 같은 혈연·지연 중심 커뮤니티가 유독 발달해 있는 것도 새로운 사회 관계망이 만들어지는 데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시니어들이 배움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행복 코칭’ 강좌를 진행 중인 전광수씨(러닝네트웍스 대표)는 말했다. 조지 베일런트가 〈행복의 조건〉에서 말한 대로 “건강하고 장수하려면 병원에 가기보다 배움에 힘쓰라”는 것이다.

지혜로운학교는 한국 사회에도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중이다. 수원시 평생학습관은 지난해 ‘누구나학교’를 개교했다. 지역주민이면 누구나 강좌를 개설할 수 있는 모형으로, 지혜로운학교의 지역사회판이라 할 수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강좌나 모임을 개설할 수 있게끔 중개하는 온라인 플랫폼 ‘위즈돔’도 생겨났다. 지혜로운학교가 물꼬를 튼 이른바 ‘시민주도형 평생학습 모델’이 이곳저곳에서 날개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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