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처서가 지난 다음부터 이미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제아무리 억센 더위도 시간 앞에서는 속절없이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나 보다. 이러니 어찌 겸허를 배우지 않을 수 있으랴. 세월은 모든 것을 키우고 또 때가 되면 내치는 법이다. 그런데 유독 예술만은 오래 남아, 그래도 영원한 것이 있다고 고개를 바짝 치켜든다. 예술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자부심도 그 오래 이어지는 시간을 이겨내는 힘에 기인한다. 백지혜의 그림책 〈꽃이 핀다〉는 그림책이 예술의 반열에서 결코 처지지 않음을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책의 판형은 손에 꼭 잡힐 듯 자그마하다. 가로가 조금 긴 판형으로 왼쪽 화면에는 글을, 오른쪽 화면에는 그림을 담고 있다. 글과 그림이 서로 이어져 있으나, 그림은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기에 독립된 화폭으로 보아도 좋다. 표지에는 붉은 바탕에 흰 찔레꽃이 한 송이, 고스란히 압화를 옮겨둔 듯한 생동감 속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귀퉁이의 색동 댕기를 잘라둔 듯한 색의 배열도 어여쁘다. 표지의 예스러운 목각본 글자체도 우리 꽃, 우리 색으로 가득 찬 이 그림책의 세계와 어긋나지 않는다. 면지는 연꽃 문양을 회색의 바탕 위에 흰 소묘로 표현해두고 있다. 꽃의 세계들이 서로 대칭을 이루며, 각각의 원환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독립적이면서 서로 연결된 셈이다. 이 책 속 모든 꽃이 그러하듯. 속표지에는 작고 어여쁜 꽃마리가 조르륵 매달려 있다. 초록의 줄기와 잎 속에 연파랑 꽃잎이 으쓱으쓱 피어 있다. 흰 여백의 효과를 충분히 살리며 작고 조밀한 것의 정갈함을 느끼게 한다. 뒤표지는 다시 잇댄 조각보를 보여줌으로써 꽃을 넘어 색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처음 표지에 나타나는 색동 깃과 조응한다. 자연에 깃든 색 또한 이 작품의 중심축이며, 이제 형체를 넘어 더 넓은 지평으로 옮겨가야 함을 보여주는 셈이다.

<꽃이 핀다> 백지혜 지음, 보림 펴냄
쪽 등 천연재료에서 얻어낸 색감

판형에서 속표지에 이르는 이들 그림책의 주변 텍스트들은 그림책의 본문만큼이나 하고 있는 말이 많다. 그림책이 체구가 아주 작은 예술 형식이며, 그러기에 어느 하나 허투루 하기에는 지면 하나하나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주변 텍스트의 아기자기한 공간들에 부려놓은 색과 형태, 글자체와 디자인 등에 기대어 작가는 마음속 웅크린 말들을 효과적으로 쉼 없이 건네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본문을 펼치면 ‘빨강, 동백꽃 핀다’라는 글과 함께 그림이 확 안겨온다. 작고 섬세한 붓끝으로 정밀하게 그려낸 노란 암술과 수술, 붉은 꽃잎과 초록의 잎들이 함께 피어나고 있다. 비단이라는 재료의 저항을 손쉽게 누그러뜨리며, 수묵담채와는 완연히 다른 색감의 세계, 우리 옛 그림의 또 다른 세계인 진채의 세계를 이 책의 그림들은 양껏 펼쳐 보여준다. 분홍 진달래와 자주 모란은 물론이거니와 이 그림책에 표현된 그 어떤 꽃들도, 열매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를 새록새록 보여주고 있다. 그저 단순한 재현이 아닌 대상의 특성을 한층 더 또렷하게 돋을새김하고 있으며, 배경색의 조율이나 색의 농담을 통한 입체감을 확보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 색감들이 모두 안료를 섞어 얻어낸 것이 아니라 쪽, 꼭두서니, 돌멩이, 흙에서 길어낸 색이라니.

물론 이 작고 조밀하게 펼쳐진 아름다움들에도 아쉬움은 없지 않다. 계절의 변화나 색감의 배열 혹은 문화적 상징을 통한 관계의 배치 등을 통해 이야기를 함께 담아낼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자칫 이야기가 아름다움을 해칠지도 몰라 그 자체가 과욕일 수도 있으리라. 그저 이 그림책은 이야기를 넘어 화면 하나하나, 선으로 형태를 잡고, 형태에 색감을 부여하고, 색감의 농담과 변형들, 반사와 투영을 음미하는 가운데 작가가 화폭을 채워가는 과정 자체를 가만가만 재구해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내 속의 이야기는 만들어진 셈이 아닐까.

기자명 김상욱 (춘천교대 교수·국어교육)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