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 일본 도쿄에 일주일 정도 연수를 받으러 다녀왔다. 주변에 소식을 전하니 하나같이 방사능 이야기를 건넸다. 도쿄는 괜찮으냐는 질문부터, 한동안 떨어져 있자는 주문까지. 그런 반응을 이해하면서도 좀 착잡하긴 했다. 무시무시하게 위험한 것이 저 너머에 있고, 그것이 가까이 오면 안 된다는 공포. 하지만 이 공포가 저 너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 ‘위험한 것’이 바로 자기 옆에 있다는 인식까지도 이어지지 못했다.

괴담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이 민주주의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난 해에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는 책에서 “빈곤은 계층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지구온난화나 방사능 누출과 같은 현대적 위험은 전 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이기에 그 누구도 이를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여기서 ‘민주적’이라는 의미는 위험에 대한 정보가 평등함까지 의미하지는 않는다. 울리히 벡 역시 정보를 쥐고 있는 전문가 집단과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들이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협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래야 일말의 대안이라도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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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위험 앞에서 정보가 통제되고 있다고 느낄 때 괴담이 등장한다. 물론 ‘괴담’이라는 용어가 불편하긴 하다. ‘빨갱이’처럼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규정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광우병 괴담, 천안함 괴담 등 권력이 낙인찍은 괴담의 역사만 해도 책 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정부 역시 최근 일본 방사능 유출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괴담이라 규정한 후, 이를 엄하게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걱정과 염려가 근거 없는 것임을 증명할 책임은 정보를 쥔 권력자에게 있다. 그리고 이 증명은, 유포자를 잡아 취조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공론장에서 공개된 정보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듯 괴담은 원자력 같은 폐쇄적 존재를 민주주의 공간으로 끄집어낸다. 괴담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 이게 바로 민주주의다.

현재 괴담이라 낙인찍힌 이야기들의 귀결점은 일본산 식품의 수입 제한 요구이다. 외부 피폭과 내부 피폭의 차이를 논하기 이전에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공포에서 시작된 이 목소리는, 정작 공포의 실체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흘러나온 방사능 오염수는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태평양 전역으로 퍼진다. 초강대국 일본조차 사건 발생 2년이 지나도록 손조차 쓰지 못하고 있다. 이게 원자력 발전의 맨얼굴이다.

일본산 식품의 수입을 막기만 한다면 우리는 안전할까. 2013년 기준 원자력발전소 개수 세계 5위, 국토 면적으로 나눠보면 원전이 가장 밀집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매일같이 원전 비리가 터져나온다. 이게 진짜 공포다.

반핵운동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었던 것이 음식에 대한 방사능 오염 공포였다. 일본의 반핵운동은 히로시마 원폭 직후 시작되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1954년 비키니 섬 수소폭탄 실험에서 피폭된 방사능 참치가 일본 국내로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었다. 체르노빌 사건 이후 독일인은 정부 발표를 의심해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다니며 식료품을 검사했고, 이런 가운데 반핵을 기치로 내건 녹색당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공포는, 그 공포의 원인을 없애는 운동과 연결될 수 있을까? 방사능 괴담이 과연 반(反)원전 토론과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운동과 토론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괴담은, 민주주의의 통과의례로 자연스럽게 인식될 것이다.

기자명 임재성 (평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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