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멈춰서는 순간 다수당 지지자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국회의 주 임무인 법률을 통과시키는 일이 정지되어 국민의 삶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고. 최근에는 그중에서도 특히 민생 관련 법안이 중요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의회의 주 임무가 정말로 그것뿐일까.

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는 원시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제도의 근원을 찾곤 하는 서양식 설명 방식과는 조금 상반된 이야기지만, 실제 역사에서 의회는 국민 하나하나의 생각이 아래에서 위로 반영되어가는 과정에서 형태를 갖추게 된 제도가 아니라, 13~14세기를 거쳐 서로 전쟁을 거듭하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국왕이 전쟁 자금을 특별세 형태로 조달하기 위해 전국 규모의 대의기구를 소집한 데서 비롯된 제도다. 아래에서 위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하향식으로 만들어진 제도라는 것이다. 그 두 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국가주의자 혹은 전체주의자로 분류될 것 같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의회를 설립한 예는 이후 근대화를 겪은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째서 그럴까?

이유는 자원 동원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왕실이 직접 소유한 자원만으로 전쟁을 치르는 절대주의 국가보다 전쟁 수행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그래서 민주화를 못한 나라는 역사가 몇 천 년이 됐든 민주화되고 산업화된 나라에 굴복하고 만다. 망하지 않으려면 산업화와 함께 반드시 어느 정도의 민주화를 ‘도입’해서 서양식 근대국가의 형태를 갖춰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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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향식 대의기구의 핵심은 동의다. 왕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세금을 걷는 것에 대해, 전국에서 소집된 귀족대표들이 그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절차다. 이후 전쟁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걷어야 할 세금도 그만큼 증가하면서 동의를 얻어야 할 국민의 범위도 훨씬 넓어진다. 대의제가 더 낮은 계급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마침내 상향식 민주화로 대의제를 설명해도 현실과의 모순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다시 국회의 주 임무 문제로 돌아가 보자. 눈에 보이는 성과물은 아니겠지만, 의회가 생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공공재는 법률이 아니라 정당성일지도 모른다. 법안 자체를 작성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냥 왕이 읊고 서기 하나가 받아 적기만 해도 된다. 어전회의를 꾸릴 대신들이 스무 명쯤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300명이나 되는 대표를 뽑을 필요는 없다. 그 300명을 뽑기 위한 전국 규모의 선거는 말할 것도 없다.

의회는 끊임없이 정당성을 생산해야 하는 공장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법은 모든 국민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기가 어렵고, 충분한 세원을 통해 뒷받침되기도 어렵다. 그래서 민주국가의 법률과 정책 그리고 그것을 통해 발현될 정부의 의지는 언제나 의회를 통해 정당성을 얻어야 한다. 마지못해 하향식 민주화를 도입했던 부국강병주의자들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의회는 쉬지 않고 정당성을 생산하는 공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실패한 정부가 직면하게 될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비슷하다. 바로 저항이다. 국가는 늘 국민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의회가 정당성을 생산하는 일을 포기하고 계절이 바뀌도록 말꼬리 잡기 놀음이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정당성은 의사당을 뛰쳐나와 자신을 받아줄 어딘가에 몸을 맡기게 된다. 지붕조차 없는 거리의 촛불 아래라도 충분히 안락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런데 역사상 그 불꽃을 가장 확실하게 잠재웠던 게 무엇인가. 바로 의회다. 누가 무슨 짓을 하건 마음만 먹으면 절대 뺏기지 않을, 정당성 생산기능을 무능하게도 거리의 정치에 홀랑 빼앗겨버리는 것. 대의제의 위기란 그런 것이다.

기자명 배명훈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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