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해 나는 고교 2학년이었다. 1987년은 나뿐만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해였다. 연초부터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대학생이 있었고, 여름이 시작되던 6월9일에는 시위에 나섰던 대학생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죽었다. 이 무렵 나는 서울의 여러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서고협)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해 연말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 명동성당에서 공정한 대통령 선거 보장과 교육 민주화를 주장하며 농성시위를 시작했다.

아직 선거권도 없는 나이였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비장한 각오와 구호뿐이었다. 선거 결과도 우리의 예상과 크게 어긋나버렸다. 그로부터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고, 나는 세상의 표면보다 그 내면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잠시 공장에 들어갔다가 이후 3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건설 현장의 막노동자로 먹고살았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변혁에 대한 들끓는 열망과 냉소가 범벅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 반포 어디쯤의 현장에서 피곤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아파트 불빛들이 환했다. 커다란 불빛 하나에 한 가구씩, 평균 4인 가족이 켜켜이 포개져 사는 곳, 문득 세상엔 저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구나,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도 바뀌지 않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단지 겉으로 보이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일상의 지배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뉴시스〈/font〉〈/div〉한국 아파트는 ‘아파트 단지’라는 폐쇄성이 문제다. 이것이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우리말에서 ‘집’은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들어가 살기 위해 지은 건물(house)이란 뜻 못지않게 가정(home)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집은 부동산(real estate) 상품이 되었다. 어쩌면 그런 흐름을 강하게 추동한 것이 바로 아파트라는 균질하고 규격화된 거주 형태(상품)의 출현일 것이다. 전 세계 도시화율은 50%이지만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95%에 달한다. 아파트는 그런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주거 수단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공동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파트는 문화적 사유의 대상이기보다는 재산 증식의 수단이거나 분열된 공동체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왜 입주민들은 공적 주체가 되지 못하나

저자 박철수 교수(서울시립대 건축학과)는 오래전부터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에 대해 문화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드문 학자였다. 이 책 〈아파트〉에서 저자는 신문기사와 통계 등 기존 자료들은 물론이고 소설 같은 예술작품에서 표상되는 아파트의 이미지까지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그가 발견한 대한민국 아파트의 문제는 단순히 거주자·투기·아파트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외부의 공공 공간과 직접 접속하고 출입하는 형식이 아닌 ‘단지식 개발’만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특유의 ‘단지식 자폐 문화’가 아파트라는 일상의 공간을 더불어 사는 사회를 파괴하는 고약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아파트’라는 거주 형식보다 ‘아파트 단지’라는 폐쇄성, 거기에 공공 공간을 자비로 부담하게 만든 시스템이 입주민들을 공적 주체(공적 냉소)에서 사적 주체(사적 정열)로 변질시켰다는 거다. 아파트가 더 이상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될 수 없는 시대, ‘마을 만들기’라는 흐름과 연계해 저자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쯤에서 새로 시작하지 못한다면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는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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