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맺어진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 간의 위험한 군사행동방지협정’에는 희한하게도 레이저 사용에 관한 조항이 있다.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가 레이저 무기를 사용해 상대 군대의 인명이나 장비에 손상을 입힐 우려가 있을 경우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가에 관한 조항이다. 한국인이 보기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조항이지만, 상대국 처지에서는 꼭 필요한 조항이었던 모양이다.

이 협정의 ‘용어의 정의’ 부분에서는 또 다른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대목이다. “‘항공기’라 함은 우주선을 제외한 당사국 군대의 모든 군용 항공기를 말한다.” 이것도 역시 우리한테는 도대체가 쓸데없어 보이는 조항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의미가 있는 조항이라 눈에 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1967년에 이미 일명 우주조약(The Outer Space Treaty)이라는 것에도 사인했다. 천체나 우주공간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고 거기에 무기를 배치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조약인데, 1966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채택되고 1967년 10월에 발효된 조약을 10월13일에 벌써 비준했다고 하니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다른 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우주국가가 된 느낌이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 우리한테 우주조약 따위가 왜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을 할 텐데, 그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외계 천체를 이용하거나 거기에 무기를 배치할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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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조약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명목상 대등한 나라끼리의 협약이고 일국일표제가 적용되는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조약인데, 세부 조항을 보면 각각의 당사국이 실제로는 너무나 다른 형태와 규모의 국가를 각자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우주를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어서 그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가 실제로 필요했던 나라와, ‘저게 어느 나라 이야기야’ 하며 사인이나 했을 나라.

그런데 그 1967년 우주조약에는 이런 조항이 들어 있다. 우주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모든 당사국은 국적에 관계없이 조난당한 우주인을 인류의 사절로 간주하고(astronauts shall be regarded as the envoys of mankind) 구조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는 조항이다(현실적으로는 적국인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나 일어났을 일이다!). 실제로 그럴 일은 별로 없었겠지만, 이론상으로는 한국도 지난 수십 년간 바로 이 입장을 취해야 했다.

1967년 우주조약에 대한 다른 입장들

해외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끔 이 조항을 떠올리게 된다.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자연재해나, “한국인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 사고 현장 소식이나. 물론 한국어로 된 보도이니 한국인 사상자 숫자를 신속하게 확인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 뒤에 붙는 묘한 말들이 종종 씁쓸한 여운을 남기곤 한다. 이제 우리 일이 아니니 안심하고 봐도 좋다는 의미의 말들.

그 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67년에 이미 〈달과 기타 천체를 포함한 외기권의 탐색과 이용에 있어서의 국가 활동을 규율하는 규칙에 관한 조약〉에 가입했으나 그게 뭐에 쓰는 조약인지 관심도 없었을 나라와, 국적을 떠나 곤경에 처한 모든 인간을 인류의 사절로, 즉 다 똑같은 지구인으로 간주하겠다는 나라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하든 선택은 그냥 선택일 텐데, 내가 SF 작가여서 그런 걸까, 자꾸만 후자 쪽으로 눈이 가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야 어쨌든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국적과 관계없이 모든 곤경에 처한 인간을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나라에.

기자명 배명훈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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