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불법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궁지에 몰리자 흉흉한 소문이 돈다. CJ의 ‘친인척 그룹’으로 이재현 회장의 자금 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을 삼성그룹 측이 검찰에 정보를 흘린 것 아니냐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근거가 제시된 바는 없다. 

삼성과 CJ그룹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그 뿌리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다. 그의 삼남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며, 장남은 이맹희 제일비료 전 회장이다. 그리고 이맹희 전 회장의 아들이 이재현 CJ 회장이다. 한 집안의 가계도를 서술하는 데 ‘회장’이라는 용어가 이토록 많은 것은 한국 자본주의 특유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하 직위 생략). 그런데 근거 없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퍼지는 이유는, 이런 ‘회장’들 사이에서 사실상의 골육상쟁이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법원은 부친의 유산을 둘러싼 이맹희 제일비료 전 회장(왼쪽)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오른쪽)의 소송에서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재 장남인 이맹희와 삼남인 이건희 사이에 부친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이 뒤늦게 진행 중이다. 공식적으로는 이병철 전 회장 자녀들 사이의 유산 배분은 이미 1990년대에 완료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삼성그룹에서 한솔·CJ·새한·신세계 그룹 등이 분리되어 나왔다. 그러나 이건희 외의 형제자매들이 몰랐던 유산이 있었다. 이병철 전 회장이 생전에 다른 사람(주로 삼성 임직원) 명의로 보유했던 삼성생명·삼성전자 주식들이다. 이 ‘차명 주식’의 존재가 드러난 사건이 바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의 ‘삼성 비자금 폭로’다. 이에 따라 검찰 수사가 진행되었고, 이건희는 부친의 유산으로 인정된 삼성생명 3244만여 주와 삼성전자 225만여 주를 자기 명의로 변경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부친의 유산이라면 이건희 회장 이외의 형제자매에게도 권리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맹희가 지난해 2월 이건희를 상대로 삼성생명 주식 824만여 주 등을 요구하는 ‘상속재산 분할청구 소송’을 낸 것이다. 이는 ‘집안싸움’이지만, 국민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이건희가 패소하면 4조원 이상 가치의 주식을 이맹희 등에게 양도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 ‘이건희 가문→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로 이어지는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허물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건희도 이맹희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건희는 출근길에 만난 기자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퇴출당한 사람… 이맹희씨는 감히 나를 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니다. 나를 포함해 누구도 (이맹희를)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그(이맹희)는 30년 전에 나를 군대(군사정권)에 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발했던 사람이다.” 진중하기로 유명한 이건희로부터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친 언사다. 이렇듯 이건희가 형에게 가진 앙금을 이해하려면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맹희는 명실공히 삼성그룹의 ‘황태자’였다. 그런데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다. 당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공장 건설에 필요한 시설재로 위장해서 사카린 원료를 수입한 사건이다. 당시는 관세율이 매우 높아서 밀수에 성공하면 정식 수입의 몇 배에 달하는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폭로된 뒤 이병철이 회장직에서 물러나자, 이맹희는 17개 주력 계열사의 부사장·전무·상무·이사 등을 겸임하게 되었다. 사실상의 그룹 회장이었던 것이다. 이맹희가 발간한 회고록에 따르면, 이 같은 지위에 있던 그가 삼성그룹에서 밀려나고 만 것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청와대 투서 사건 계기로 이맹희 축출

비난 여론이 잠잠해진 1960년대 말쯤부터 이병철은 그룹에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인 1969년 터진 것이 ‘청와대 투서 사건’이다. 이병철의 각종 비리, 탈세 등을 청와대에 제보하며, 그의 회장 복귀를 막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건희가 이맹희를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발했던 사람”이라고 부른 배경이다.


 

그러나 이 ‘청와대 투서’를 주도한 사람은 이맹희가 아니라 차남인 이창희(새한그룹 전 회장으로 1991년 타계)로 알려져 있다.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아버지가 나도 이 일에 개입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라고 관련성을 극구 부인한다. 그에게 이 사건은 “동생 창희의 아버지에 대한 ‘모반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삼성그룹 회장직을 맹희·창희 형제로부터 삼남인 이건희에게 옮기게 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이병철은 1973년 이맹희를 삼성그룹 실권자 지위에서 축출한다. 이맹희가 가진 17개 계열사 임원 직위 중 삼성물산·삼성전자·제일제당의 부사장 직함만 남겨두고 모두 박탈했다. 그리고 1976년에 이건희를 삼성그룹 차기 총수로 확정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1987년 이병철이 타계하기까지 후계구도를 흔드는 시도가 연이어 이어졌다. 이건희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지거나 이를 빌미로 사정 당국에 제보가 들어갔다. 이건희의 최근 발언을 보면, 그는 이맹희가 그런 일을 주도했다고 믿는 것 같다.

1987년 이건희가 삼성그룹 경영권을 이어받은 뒤 이루어진 계열분리에서 이맹희 집안은 제일제당을 할당받았다. 당시 이맹희는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사실상의 유랑 생활 중이었고, 부인 손복남씨와 아들 이재현이 계열분리를 주도해 CJ그룹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계열분리 이후에도 형제 집안 간의 앙금은 때때로 폭발했다. 대표적으로는 2011년, CJ가 추진 중이던 대한통운 인수전에 삼성SDS가 뛰어든 사건이 있다. 

지난 2월 재판부는 ‘이건희 대 이맹희’ 사건에서 일단 이건희의 손을 들어줬다. 일부 주식은 청구 가능 기간이 지났고, 다른 주식은 상속재산으로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맹희는 항소장을 제출해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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