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 한국인들에게는 한때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포의 땅이었으나,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전쟁과 학살, 마피아, 경제적 혼란으로 표상되는 나라들이다. 작가 유재현이 지난 6개월여 동안 CIS와 동유럽의 깊숙한 내면을 탐사하고 돌아왔다. 〈시사IN〉은 지금도 방진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체르노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알려진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 등에서 작가가 울고 웃고 분노하고 회한에 떨었던 기록을 연재한다.

루마니아와 헝가리 국경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둘 다 셴근 조약국이어서 월경이 수월했을 것이다. 도로는 차이가 확연하다. 내내 거칠고 빛바랜 루마니아의 도로는 국경 너머에서 짙은 흑색의 깨끗한 아스팔트 도로로 바뀌고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는 톨게이트 대신 무인 카메라가 등장한다.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무인 카메라의 나라인 한국에서 왔지만 나도 모르게 목덜미가 오그라든다.

헝가리 고속도로의 무인 카메라는 도로세 미납을 적발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흔히 ‘그린카드’라 불리는 자동차 책임보험은 유럽연합 국가에 옵션으로 몰도바·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 등을 선택하고 기간을 정해 가입할 수 있다. 그 후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 반면 비네트라고도 불리는 도로세 스티커는 나라마다 구입해야 해서 번거롭기 짝이 없다.

ⓒ유재현겔레르트 언덕에 있는 자유의 상. 평화를 상징하는 야자나무 잎을 들었다.

부다페스트의 겔레르트 언덕. 고작 해발 235m이지만 이 도시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다. 어둠 속에서 다뉴브 강이 흐르고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펼쳐진다. 절제된 야경은 수려하다. 강을 둔 야경만큼 까다로운 것이 없다. 빛이 조금이라도 과하면 천박해 보이고 부족하면 묻혀버린다. 불빛이 아닌 어두운 강물에 시선을 주도록 한 야경은 부다페스트가 아니라면 좀처럼 찾기 어렵다. 연인 몇 쌍이 보일 뿐 한밤의 언덕은 적막하다. 요새의 성벽은 어둠에 묻혀 있고 자유의 상만이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의 상은 팜 야자나무의 잎을 두 손으로 높이 치켜든 여성상으로, 부다페스트의 가장 높은 언덕에 40m 기단 위에서 14m 높이로 다뉴브 강을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다. 야자나무 잎은 올리브 잎처럼 평화를 상징한다. 처음 디자인은 야자나무 잎이 아니라 아이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 유래된 자유의 여신상과는 사뭇 다르다. 자세는 다부지고 여성성은 지극히 약해졌다. 1947년에 완성되어 이 자리에 세워진 동상은 ‘해방 기념상’으로 불렸고 때와 이름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1945년 1월 소련의 헝가리 해방을 기념하는 상이었다. 1990년 이후 철거 논의가 활발했지만 대부분 보존하고 전면의 ‘소련 병사’상만 없애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소련 해체 후 특히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잔재 청산 작업이 활발했다. 대표적으로 공공장소에 놓인 조형물들은 예외 없이 철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레닌은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 기타 소련과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조형물이 대상이었다. 겔레르트 언덕의 해방 기념상처럼 이름은 바뀌었을지언정 살아남은 것은 예외에 속한다. 조각가인 키스팔루디 지그몬드가 정치색이 옅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관련이 없는 예술가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철거된 조형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운이 나쁜 경우는 고철로 처리되었고 다른 경우는 눈에 띄지 않는 후미진 곳에 버려졌다.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 땅속에 파묻혀 먼 훗날 미래의 인간들에게 발굴되어 박물관으로 모셔질 판이었다. 동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런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부다페스트는 좀 달랐다. 1993년 시 당국이 쏟아져 나온 철거 조형물을 한데 모아 공원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어 실현되었다. 이게 부다페스트 외곽의 공지에 만들어진 야외 박물관 메멘토 공원의 시작이다.

ⓒ유재현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본 다뉴브 강의 야경.

1956년 헝가리 항쟁의 추억

지금 메멘토 공원은 부다페스트의 관광지 중 하나다. 입구 맞은편에는 콘크리트 축대 위에 검은 장화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인 동상을 볼 수 있다. 1956년 헝가리 반소 항쟁 당시 부다페스트 시내의 거대한 스탈린 동상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동강이 나버렸는데 기단에는 한동안 장화만 남아 있었다. 메멘토 공원의 장화 동상은 그때를 재현해둔 것이다. 입구에는 레닌과 마르크스, 엥겔스 상이 놓여 있다. 레닌은 그저 평이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상은 큐비즘(입체파) 스타일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32년 소련의 ‘문학과 예술조직의 재편성과 관련한 법령’ 포고와 함께 등장한 문예창작 이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회 리얼리즘과는 그 점에서 구분된다. 엄격하기 짝이 없었던 이론이 좀 분방해지는 건 스탈린 사후인데, 동유럽에서는 인상주의와 입체파, 심지어는 초현실주의까지 받아들인 작품이 등장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원형 잔디밭 주변으로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 왼쪽에 놓인 것은 겔레르트 언덕에서 추방(?)된 소련군 병사 동상이다. 흔히 따발총이라 불리는 파파샤 소총을 어깨에 메고 큼직한 깃발을 들었다.

광장을 압도하는 것은 전면의 거대한 1919년 공화국 기념상이다. 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3월에 등장해 5개월 만에 막을 내린 헝가리 사회주의 공화국을 기념하는 상으로, 경기장에 세워져 있었던 동상이다. 붉은 깃발을 들고 절규하듯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는 노동자풍의 인물과 ‘전장으로! 전장으로!’라는 구호가 함께 쓰였던 아방가르드풍의 포스터를 재현한 것인데, 후일 처참하게 실패한 헝가리의 1919년 혁명 지도자 벨라 쿤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19년 혁명의 주역이던 벨라 쿤과 티보르 자무엘리, 예뇌 란들러의 모습은 공원 한구석의 부조로도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1920년의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 등 사방의 영토를 빼앗긴 후 헝가리는 이전 영토의 71%를 잃었고 헝가리계 인구의 66%는 창졸간에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지에서 외국인으로 살아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섭정인 미클로시 호르티가 권력을 쥐었던 헝가리는 두 번에 걸친 빈 중재로 체코슬로바키아와 북 트란실바니아 등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 보은이었는지 아니면 나머지 영토도 모두 찾아볼 욕심이었는지 독일의 소련 침공에 때를 맞추어 추축국에 가담하고 참전했다. 패전이 임박했을 때 미클로시 호르티는 은밀하게 연합군과 휴전을 모색했고 1945년 10월15일 공개적으로 휴전을 선포했지만, 결과는 독일군의 침공과 괴뢰 정권인 시(矢)십자당 정권의 출현이었다. 결과적으로 헝가리는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던 루마니아와는 달리 소련군이 진주할 때까지도 추축국의 일원으로 남았다. 시십자당의 당수였던 페렌츠 살러시는 1946년 헝가리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명백하게 전범이며 헝가리군이 세르비아 등지에서 저지른 대량학살의 책임자였던 미클로시 호르티는 뉘른베르크 법정까지 갔지만 고작 증인이었고 1945년 12월 석방되어 미국의 보호를 받았다. 1956년 헝가리 항쟁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호르티는 몹시 실망했고 이듬해인 1957년 망명지이던 포르투갈에서 죽었다. 2차 세계대전 전범 처리는 매사 이런 식이었다.

ⓒ유재현메멘토 공원 입구. 오른편에 장화만 남은 스탈린 동상이 보인다.

필자가 부다페스트에서 머물던 호텔은 시내 이면도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맞은편 건물의 벽에는 탄흔이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건물 벽이 총상을 입었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혹은 1956년 항쟁 때이다. 어떤 경우건 반세기가 넘은 지금 평범한 건물에 탄흔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리셉션 데스크를 지키는 청년에게 물었다. 역시 고개를 갸우뚱한다. 1956년 당시 소련군과 격렬하게 충돌했던 거리가 근처이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라 한다. 공교롭게도 묵고 있던 객실 창문 너머의 건물이다. 물끄러미 보고 있다 보니 시간은 거꾸로 돌아간다.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은 동유럽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10월23일 부다페스트에서의 시위는 작가동맹이 앞장서고 학생들이 주도했다. 의심할 바 없이 반소 시위였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헝가리 주둔 소련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전에 실각했던 임레 나지가 수상으로 복귀했다. 임레 나지의 대안은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립적인 헝가리. 스탈린식 도그마의 거부였다. 다당제의 도입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탈퇴, 헝가리 주둔 소련군의 철수 요구는 그런 가운데 등장했다. 경제적으로는 소련식 중공업 중심 경제정책과 농업 집산화 정책의 포기를 선언했다. 소련의 응답은 탱크를 앞세운 전면적 침공이었다. 11월1일 국경을 넘은 소련군은 시가전까지 벌여야 했지만 압도적인 무력으로 11월20일 작전을 종료했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몸을 피했던 임레 나지는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대사관에서 나왔지만 체포되었고 2년 뒤 처형되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하철

부다페스트 관광 하면 부다의 왕궁과 페스트의 안드라스라고 했다. 안드라스 대로의 성 이슈트반 성당에서 세체니 온천 목욕탕까지를 걸으면 대충 페스트의 볼거리는 그 거리에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부다페스트의 지하철은 입구부터 고풍스럽고 내부는 소박하기 짝이 없어 키예프와 모스크바의 것과는 차이가 현격하다. 말하자면 이 도시는 핵전쟁의 공포에 시달린 적 없는 도시다. 타려고 내려간 것이 아니어서 다시 올라와 거리를 걸었다.

ⓒ유재현세체니 온천 목욕탕 건물은 네오바로크 스타일로 지었다.

세상의 모든 공중목욕탕을 초라하게 만들고야 마는 세체니 온천 목욕탕. 1913년에 문을 열었다. 제국이 남긴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역사(役事)가 공중목욕탕이라니 의외로 훈훈하다. 대지만 6280㎡(1900평). 문을 연 첫해에만 20만명 이상이 이 목욕탕을 찾았고 이듬해에는 9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네오바로크 스타일의 건물은 얼핏 목욕탕처럼 보이지 않지만 주변 장식이나 조각을 보면 모두 물과 관련 있는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분위기는 거의 동네 목욕탕이다. 목욕용품 등속을 담은 바구니를 든 중년 여자들, 피곤에 지쳐 넥타이를 절반쯤 풀어버린 샐러리맨풍의 사내들, 시큰둥한 표정이어서 끌려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소년 소녀들, 매표소에서 느긋하게 수다를 늘어놓는 할머니. 눈에 익은 정경이 훈훈하지 않은가. 규모가 큰 목욕탕이다 보니 알몸으로 휘휘 돌아다닐 수는 없다.

어부의 요새며 시장이며 술렁술렁 돌아다니다 저녁에 찾은 오페라하우스. 등급이 낮은 좌석이기는 하지만 요금은 1000원을 넘지 않는다. 문화에 계급적 요소가 약해지면서 이른바 고급문화가 실종된 것은 확실히 소비에트의 유산이다. 왕년의 고급문화의 무릎을 꺾어 주저앉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것 이외에 새로운 대중문화에 대한 창의성과 다양성에서는 별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왜 만날 오페라와 발레나 클래식 콘서트였단 말인가. 레닌그라드의 아파트 보일러실 노동자 출신으로 1980년대 초 언더그라운드 로커로 등장해 1987년 다섯 번째 앨범인 〈혈액형〉으로 연방 전체를 록으로 휩쓸었던 빅토르 최가 전설이 되어버린 것은 소련 해체의 전야에 이르러서였다. 한데 록이란 건 1950년대 미국의 로큰롤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던가.

기자명 유재현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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