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 한국인들에게는 한때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포의 땅이었으나,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전쟁과 학살, 마피아, 경제적 혼란으로 표상되는 나라들이다. 작가 유재현이 지난 6개월여 동안 CIS와 동유럽의 깊숙한 내면을 탐사하고 돌아왔다. 〈시사IN〉은 지금도 방진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야 하는 체르노빌,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알려진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 등에서 작가가 울고 웃고 분노하고 회한에 떨었던 기록을 연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군 양쪽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드레스덴과 바르샤바는 종전 후 폐허 속에서 쓸 만한 돌들을 추리며 안간힘을 쓴 결과 얼추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두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멀쩡했던 한 도시가 있었는데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부카레스트)였다.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까닭에 1944년 연합군의 폭격을 받기는 했지만 피해는 대략 10% 초반이었다. 드레스덴이 90% 이상, 바르샤바가 80% 이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미약한 피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태를 재빨리 파악한 왕정파가 1944년 8월 친나치 안토네스쿠 군부정권을 무너뜨린 후 연합군 편에 가담했던 것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유재현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 1980년대에 들어섰다.
그런 부쿠레슈티가 유럽에서 전쟁 전의 모습을 가늠하기 가장 어려운 도시가 된 것은 1977년 부쿠레슈티를 덮친 지진으로 말미암아 1989년까지 진행된 대규모 도시개발의 결과였다. 체계화(Sistematizare)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도시개발은 공산당 서기장인 최고 권력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주도했다. 당시 부쿠레슈티의 ‘체계화’가 얼마나 과격했는지는 철거 대상 지역이 500㏊에 달했고 그중 도심에 해당하는 면적이 200㏊에 달했다는 기록이 말해준다. 그 와중에 도시의 역사를 증언해줄 건물이 수도 없이 사라졌다.

그 결과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부쿠레슈티의 상징적 장소가 통일대로다.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3㎞의 대로는 주변이 거대한 아파트와 일반 건물들로 메워져 있는데 모두 1980년대에 등장한 건물이다. 통일대로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단일 건물이라는 인민궁전은 아마도 그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작은 파리’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부쿠레슈티에 걸맞게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참조해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통일대로는 샹젤리제보다 딱히 못할 것도 없다. 대로 중간의 광장과 분수대도 잘 만들어졌다.

지금은 통일대로(1918년 트란실바니아와의 통일을 기념하는 이름이다)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원래 이름은 ‘사회주의 승리대로’였다. 이 대로가 탄생한 정신은 그 이름에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지만 현실은 결국 ‘사회주의 패배대로’였다. 이 거대한 도시개발을 주도했던 차우셰스쿠는 아내와 함께 100여 발의 총탄 세례를 받으며 처형되었다.

1989년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들이 붕괴되던 시기에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차우셰스쿠가 그의 아내와 묻힌 곳은 통일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겐체아 시립공동묘지의 한구석이다. 도주 중이던 그는 결국 트루고비슈테의 데아루 수도원으로 잡혀와 총살당했다. 둘의 시신은 이 공동묘지에서 길을 사이에 두고 따로 묻혔는데 후일 하나의 묘로 합장되었다. 묘가 빼곡히 들어찬 공동묘지이지만 차우셰스쿠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묘지 관리인에게 이름을 말하자 그는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다른 묘들과 달리 붉은 대리석이어서 쉽게 눈에 띈다. 묘는 평범하지만 최근에 다시 손을 본 흔적이 역력하다. 대리석 위에는 가지런히 꽃들이 놓여 있다.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서 차우셰스쿠 시절에 대한 향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이라고 한다.

ⓒ유재현티미쇼아라의 승리광장. 1989년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곳이다.
차우셰스쿠가 태어난 마을인 스코르니체슈티는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들판을 헤매다 마을에 도착한 후에도 세 번을 헛걸음한 끝에야 찾을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차우셰스쿠는 1980년대의 ‘체계화’로 자신의 고향도 바꾸어버렸다. 농촌에서 체계화는 마을의 도시화가 기본 방향이었다. 농촌의 생활환경이 갖는 문제점들, 예를 들자면 교육과 의료시설의 부족, 기타 도시민에게만 가능한 서비스의 결여 등의 해결을 목표로 한 체계화는 근거지에 해당하는 마을들에 저층 아파트 형태의 주거시설과 함께 교육·의료 시설을 세움으로써 농촌의 도시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농촌 지역에 수없이 많은 작은 규모의 표준 도시들을 만들자는 것이 체계화가 추구하는 바였다. 스코르니체슈티도 그중 하나였다. 도시에서 사뭇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인데도 도로나 주택과 건물들은 현대화되어 있다. 차우셰스쿠의 집은 마을 어귀에 있고 여전히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마당에 큼직한 흉상 하나가 놓여 있는데 조악하기 짝이 없다. 담을 따라 심어놓은 나무에는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데 ‘사유지’라는 말도 함께 적혀 있다. 사유지이기 때문에 그나마 보존되고 있다는 말이다. 마당의 초라한 흉상도 이 집의 현 소유주가 세웠을 것이다.

차우셰스쿠 시절에 대한 향수도

동유럽에서 체제의 전환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루마니아가 유일하다. 당시 정권의 수뇌가 처형된 경우도 차우셰스쿠가 유일하다. 당시 차우셰스쿠의 재판과 처형 장면은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전 세계 유명 언론에 배포되었다. 1989년 한국의 연말연시를 장식했던 뉴스 중의 하나도 차우셰스쿠였다. 자연스럽게 김일성과 연관 짓는 보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차우셰스쿠 다음은 김일성이라는 식이었다. 

평양을 방문했고 주체사상에 관심이 있었으며 평양의 도시개발에 흥미를 가졌을지는 몰라도 차우셰스쿠와 김일성은 결과적으로 판이한 길을 걸었다. 차우셰스쿠는 미국을 포함해 서방과 비동맹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전방위적 외교관계를 완성한 인물이었다. 마오쩌둥과 폴 포트, 김일성 등을 만났지만 닉슨과 포드, 시라크에 히로히토까지 만난 인물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소련과 동유럽을 통틀어 이런 인물은 차우셰스쿠 외에는 티토(유고슬라비아)가 유일하다. 1965년 노동당 서기장에 올라 루마니아의 최고 권력자가 된 차우셰스쿠는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공개적으로 반발한 이후 줄곧 비소련 친서방 노선을 걸었다. 1971년에는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가트)에 가입함으로써 서방의 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자처했다. 가트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아버지 격이다. 냉전 시대의 서방은 서방대로 소련에 반기를 든 동유럽의 이단아인 루마니아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주로 돈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어서 차우셰스쿠에게는 독이 든 사과였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갈 때까지 기하급수로 늘어난 외채는 종국에는 루마니아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1971년에 12억 달러이던 외채가 1982년에는 130억 달러로 늘어났다. 지금도 그렇듯이 친절한 국제통화기금(IMF)이 내핍을 권고하고 나섰고 수입의 축소와 수출의 증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1986년에는 절반을 상환했고 1989년에는 마침내 외채에서 해방될 수 있었지만 때는 늦어도 퍽 늦었다.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식량은 물론 모든 소비재의 결핍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인민의 불만은 이미 하늘을 찔렀다. 그 와중인 1984년에 인민궁전까지 짓겠다고 나선 차우셰스쿠는 어쨌든 제정신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한때의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은 1968년 모여든 군중을 대상으로 차우셰스쿠가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난하며 사자후를 토하던 곳이다. 21년 뒤인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는 같은 장소에서 그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대중을 상대로 설득을 시도하지만 수포에 그치자 건물로 밀려든 시위대를 피해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했다. 건물 앞의 광장은 이제 혁명광장이 되어 있다. 광장 한편에 오벨리스크 스타일로 치솟은 기념비는 상부에 마치 새의 둥지와 같은 조형물을 걸어두었다. 기념비의 공식 이름은 ‘부활 기념비’로 공산주의 몰락 후의 루마니아를 상징한다. 새의 둥지와 같은 조형물은 왕관에 해당하는데 2005년 등장한 이후 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는 등 가끔씩 구설에 오르곤 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혁명에 걸맞게 좀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념비였을 것이다. 부쿠레슈티에 두 번째 들렀을 때에는 왕관 아래로 누군가 붉은색 페인트로 피를 흘리는 것처럼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꽤 높은 곳이어서 방법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데 아마도 총 같은 기구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관리하는 측에서도 지울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설이 관광에 미치는 영향은 때때로 대단하다.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은 중국 윈난성 관리들에 이르러 산하 현 중의 하나인 중디옌(中甸)의 이름을 샹그릴라(香格里拉)로 바꾸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최고봉은 루마니아를 드라큘라의 나라로 만들어버린 작가 브램 스토커가 아닐까 싶다. 드라큘라 관광 루트는 부쿠레슈티 인근의 스나고브에서 시나이아의 펠리소르 궁전, 브라쇼브 인근의 드라큘라 성으로 불리는 브란 성 그리고 시기쇼아라로 이어진다. 대개는 드라큘라의 모델로 알려진 블라드 체페슈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나고브의 수도원에는 무덤이 없고 성은 블라드 체페슈가 기거한 적이 없었던 성이다. 블라드 체페슈가 태어난 시기쇼아라만이 그중 진본(?)에 해당한다. 펠리소르 궁전과 브라쇼브는 애당초 무관하다. 드라큘라에서 눈을 돌리면 이 루트는 왈라키아에서 트란실바니아로 이어지는 루마니아의 변화무쌍한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길이다.

드라큘라의 도시는 어디일까

그리고 서부 국경에서 멀지 않은 티미쇼아라. 우크라이나의 리비우가 그랬던 것처럼 도시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세르비아와 헝가리 국경에서 멀지 않은 티미쇼아라는 헝가리인과 독일인·루마니아인·세르비아인들이 어울려 살았던 곳이다. 흑토로 기름진 바나트 평야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바나트 평야가 루마니아 왕국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의해 분할될 때 티미쇼아라는 루마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티미쇼아라 옛 시가지는 공원에 둘러싸여 있고 광장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대표적인 광장은 통일광장과 승리광장인데 1989년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곳은 승리광장이다. 발단은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인 라즐로 퇴케스였다. 헝가리 텔레비전에서 차우셰스쿠의 체계화를 비판한 라즐로의 인터뷰가 방송된 것을 계기로 교구는 그를 시골 교회로 전보하고 티미쇼아라의 거주지에서 퇴거할 것을 지시했지만 라즐로는 이를 거부했다. 1989년 12월16일 강제 퇴거 사태가 발생하자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게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저녁쯤 보안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등장하자 사태는 공산당사에 불을 지르는 등 더욱 악화되었다. 군이 발포하면서 유혈사태로 발전한 가운데 12월19일에는 10만명의 시위대가 오페라 광장(승리광장)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티미쇼아라의 시위는 다른 도시로 전파되었고 종국엔 차우셰스쿠 정권과 체제를 붕괴시켰다.

부쿠레슈티의 혁명광장과 달리 티미쇼아라의 승리광장에서는 그 기념비를 찾기가 쉽지 않다. 물어물어 찾은 기념비는 오페라 극장의 오른쪽, 승리광장에서 통일광장으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동판으로 사면과 윗면을 덮고 있다. 사방으로 물을 흘리는 꼭지가 만들어진 것이 독특하다. 크기가 작은 편인데 공중 수도처럼 보였으니 찾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보는 중에도 근처의 시민들이 물을 받아가는 걸 보면 정말 공중 수도 구실을 한다. 시민들과 함께 매일매일 살아 숨쉬는 기념비이니, 어쩌면 이게 진짜 기념비인지도 모른다.

기자명 유재현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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