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6일 오후 2시. 서울시 토양지하수팀 직원과 기술자 등 10여 명은 용산 미군기지 1번 게이트를 방문했다. 기지 내부의 기름오염 실태 조사를 요청하기 위해서다. 정문 앞을 지키던 미군과 한국인 경비 용역은 “상부로부터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시 직원들은 공문이라도 접수하려 했지만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정문도 넘어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주한미군에 갔더니 민사관이라는 사람이 농담 삼아 ‘대한민국 힘이 세졌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지금은 이렇게 요청도 주장도 한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2001년 용산 미군기지 주변에서 기름 유출이 발견된 후 12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기지 주변 지하수에서는 기름이 흘러나온다. 서울시에 따르면 기름 유출로 오염된 용산기지 주변 대지 면적은 이태원동 미8군 기지 인근의 녹사평 일대 1만1776㎡(약 3562평·2004년 기준)와  남영동 캠프킴 주변 459㎡(약 139평·2008년 기준) 등 1만2235㎡(약 3700평)이다.

ⓒ서울시 제공시민단체 관계자가 용산 미군기지 주변 관측정에서 나온 기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용산기지 바깥만 조사한 것으로 사실상 ‘최소 추정치’에 불과하다. 오염원인 기지 내부를 조사하려면 주한미군의 협조가 필요한데, 미군 측이 줄곧 조사를 거부해왔다. 서울시는 2003년부터 한국농어촌공사에 용역을 맡겨 용산기지 주변 오염도를 조사해왔다. 기지 안 측정이 불가능하자 ‘우회로’를 찾은 것이다. 녹사평역 일대와 남영동 캠프킴 주변, 그러니까 부대 바깥 지역에 각각 42곳과 22곳에 관측정을 묻어 매년 일정한 시점에 오염물질 농도를 측정했다(〈표〉 참조).

발암물질 벤젠, 기준치 1311배 초과

서울시가 오염도 측정에 그치지 않고 용산기지를 찾아가는 등 적극적으로 나선 건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부터다. 박 시장은 “서울시가 권한은 없지만 (오염 문제가) 개선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봐라”라고 지시했다. 시는 환경부에 ‘한·미 환경분과위원회를 열어 기지 내부 조사 추진을 미군 측과 협의해달라’는 공문을 2012년 이후에만 9차례나 보냈다. 두 번은 직접 환경부가 있는 과천 정부청사까지 찾아갔다. 지난해 12월부터는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국대사관에도 각각 6차례, 5차례 공문을 보냈다. 미군 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환경분과위원회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 산하 19개 위원회 중 하나로, 환경부와 주한미군사령부의 공식 채널이다. 환경부 토양지하수과장과 주한미군 공병참모부장이 양측 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에는 3월, 6월, 9월 세 차례 열렸다. 환경부 관계자는 “2011년과 2012년에도 이 자리에서 합동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미군 측은 곤란하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SOFA의 환경 관련 규정에 따르면 환경오염 사고 및 반환기지 환경조사 결과 공개에는 미군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또 기지 내 환경사고에 대해 정부의 독립적인 조사 권한이 없어서 오염원에 접근하기도 어렵다. 환경부 관계자는 “미군 측에 서신을 통해 사고 이후 어떤 조치를 했는지 정보를 요청했지만 주지 않았다. 정보 공개가 의무화돼 있지 않으니 현재로선 강제할 방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대신 미군은 ‘지하탱크를 지상화하고 토양도 걷어내는 등 후속 조치를 했으니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군의 설명과 달리 오염은 개선되지 않았다. 〈시사IN〉 취재 결과, 2012년 녹사평역 주변 지하수에서 검출된 △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크실렌 △석유계 총탄화수소 등 유류 오염물질의 최고 농도는 모두 환경부에서 정한 오염 지하수 정화 기준을 크게 초과했다. 정승우 군산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2001년에 검출된 오염물질이 지금까지 검출된다면 오염 지역 토양과 지하수 경계면에 유류 오염물질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IN〉이 확인한 2012년 서울시 내부 자료에 따르면,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은 기준치(0.015㎎/ℓ)를 최대 1311배 초과하는 양이 검출됐다. 기준치를 넘는 벤젠이 검출된 관측정은 전체 42곳 중 절반에 달했다. 캠프킴 주변 지하수에서는 기준치(1.5㎎/ℓ)의 최대 644배에 달하는 석유계 총탄화수소가 나왔다.

10년 넘게 지속된 조사와 정화, 소송에 드는 모든 직간접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 정부 몫이다. 서울시는 일단 자체 예산으로 정화 비용을 부담한 뒤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정부로부터 비용을 돌려받는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녹사평역 주변 지하수를 정화하는 데 34억6800만원,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캠프킴 주변 지하수를 정화하는 데는 7억1500만원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자를 포함해 49억여 원을 환수했다. 서울시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든 비용도 7500만원 가까이 들었다.

미군은 SOFA 규정을 근거로  정화 비용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있다. SOFA 제23조 5항에는 “합중국(미군)만의 책임이 있는 경우에는 재정돼 합의되거나 또는 재판에 의해 결정된 금액은 대한민국이 25%, 미국이 75%를 부담한다”라고 돼 있다. 하지만 미군 측은 ‘대한민국 정부가 제공하는 시설 및 구역 사용과 관련한 제3자의 청구권으로부터 면제된다’는 내용의 SOFA 제5조 2항을 근거로 부담금을 낼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국감 자료를 보면, 정부가 미군 대신 부담한 배상금은 약 275억원에 달했다.


6월17일 위원회에 서울시 관계자 참석 예정

서울시의 잇따른 요청에 환경부는 지난 4월29일 주한미군 측에 ‘6월 중 한·미 환경분과위원회를 열어 미군기지 기름오염 실태 합동조사를 하자’는 서한을 보냈다. 서한을 받고도 묵묵부답하던 주한미군 측은, 서울시 공무원들이 용산기지를 찾은 뒤인 5월28일 환경분과위원회 개최에 합의했다. 6월17일 열리는 위원회에, 용산기지를 찾았다가 문전박대당한 서울시 관계자도 참석할 예정이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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