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첫인상. 오토바이의 나라였다. 차선이 분명하지 않은 도로. 자동차 사이사이에 오토바이가 끼어들었다. 아직 대중교통 시스템이 미흡한 나라. 오토바이는 주된 교통수단이다. 일가족 네 명이 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풍경도 보인다. 오토바이를 탄 이들은 대개 젊은이다. 베트남은 ‘젊은이의 나라’라는 말이 실감났다. 2012년 기준으로 인구 9100만여 명 중 65%가 30세 미만이라고 했다. 베트남은 오토바이의 나라, 젊은이의 나라다.

간간이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한국 아이돌 그룹 JYJ의 포스터였다. 베트남 젊은이들 사이에 한류 열풍은 여전했다. 4월27일 하노이에 위치한 한국 교민 잡지 〈윈도 베트남〉 사무실에서 만난 하노이 대학 한국어학과 학생 다섯 명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컸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직장에 다니며 한국어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이다. 야간 과정까지 합하면 한국어학과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가 200여 명 된다고 했다. 한국 가수나 드라마를 좋아하냐고 묻자, 동방신기·빅뱅·슈퍼주니어·소녀시대·JYJ·백지영·아이유·SG워너비·다비치 등 한국 가수 이름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 최근에 방영했던 드라마까지 거의 실시간으로 본다고 했다. 한국에서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면 다음 날 베트남에서는 자막까지 입힌 파일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시사IN 차형석호찌민 시내 도로에 베트남 통일기념일을 알리는 깃발이 걸려 있다. 베트남은 1992년 한국과 수교했다.

이날 자리는 베트남과 인연이 깊은 문화기획자들과 만나기 위함이었다. 베트남 통일전쟁 당시 ‘사이공 최후의 한국 특파원’이었던 안병찬 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과 베트남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문화 마케팅 기업 쥬스컴퍼니의 문화기획자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안병찬 이사장은 수교 이후 매년 베트남 통일기념일인 4월30일 즈음이면 베트남을 찾는다. 일행 중 한 명인 윤성진 예술감독은 2005년 베트남 전쟁과 고엽제 문제를 다룬 창작 뮤지컬 〈블루 사이공〉을 제작한 바 있다. 〈미스 사이공〉이 미군의 시각에서 베트남전을 다룬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베트남인의 시각으로 베트남전을 다루고 싶었다. 이 뮤지컬로 대한민국 국회문화대상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한·아세안 문화축제 총감독을 맡은 바 있다.

베트남 한인 1세대의 감회

베트남 한인 1세대인 이순흥 전 한인회장은 베트남의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남북 베트남 최후의 결전 당시 사이공 탈출에 실패한 그는 통일사회주의 베트남에서 교민회장 구실을 했다. 비철과 고철 무역을 했던 그는 당시 역시나 베트남을 탈출하지 못해 호찌민 시 치화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현지 공관원의 뒷바라지까지 했다. 1980년 귀국했다가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이후 베트남에 돌아가 현재까지 무역상을 하고 있다. 그에게 베트남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이 회장은 베트남과 한국 관계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당시 철수하지 못하고 호찌민 시에 잔류한 교민은 대략 200명. 지금은 베트남 전체에 한국인 14만여 명이 살고 있다. 경남기업이 하노이 최고층 빌딩인 ‘랜드마크 72’를 짓고, 포스코가 하노이 전체 개발 계획을 조언하는 날이 올 줄이야. 베트남 한인 1세대인 그가 보기에 베트남 젊은이들이 한국의 음악 프로그램 〈뮤직뱅크〉에 열광하는 모습도 신기하다. 1975년 교민회장을 할 때나 1994년 베트남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지난해는 베트남과 한국이 수교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케이팝(K-POP) 공연이 많았다. 하노이 미딩 경기장에 4만여 명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에 참여했던 하노이 주재 한국문화원은 올해는 작지만 내실을 다지는 행사에 주력하고 있다. 매주 태권도 교실, 한국어 교실(세종학당), 사물놀이 교육을 진행한다. 4월 중순에는 베트남의 케이팝 팬클럽의 문화 축제를 열었다. 한국문화원은 올해 초부터 하노이에서 활동하는 케이팝 팬클럽 현황을 조사했다. 아이돌 그룹별로 결성된 13개 팬클럽은 회원 수가 약 18만명에 이르렀다. 한국문화원의 지원 아래 팬클럽 회장단이 모였고, 자발적으로 문화 축제를 꾸몄다. 전시회와 바자회를 열고, 케이팝 경연대회도 열었다. 팬클럽 회원 1500여 명이 참가했다.

ⓒ시사IN 차형석하노이 한국문화원에 개설된 한국어 교실. 한국어를 배우려는 베트남 젊은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4월에는 예술봉사단을 출범시켰다. 한국문화원이 주축이 되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베트남 젊은이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소외 청소년 보육시설을 방문해 예술 봉사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베트남 케이팝 팬클럽 회장단이 ‘이웃돕기 활동을 해보자’고 의견을 모은 결과였다. ‘뽀로로’ 베트남 판권을 가진 업체도 뜻을 모았다. 베트남 어린이도 ‘뽀로로’ 영상을 행사를 통해 볼 수 있게 됐다. 예술과 봉사를 연계한 데는 이유가 있다. 박낙종 한국문화원장은 “베트남 신문이나 페이스북 등에서 베트남 젊은이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몰입하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이웃도 사랑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문화는 교류다. 베트남 젊은 층은 한류에 대한 관심이 높은 반면, 아직 베트남의 문화는 한국에 덜 알려져 있다. 언론인 쩐칸번 〈픽토리알〉 부사장은 이 점을 아쉬워한다. 〈픽토리알〉은 국영 베트남 통신사가 발행하는 대외 홍보지로 8개 국어로 발행된다. 그녀는 베트남 국영 통신사 한국 지사장으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3년 동안 한국에서 근무했다. 쩐칸번 부사장은 ‘쌍방향 문화 교류’에 관심을 두고 올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패션쇼를 열어보려 한다. 한국의 한복 디자이너가 만든 한복과 베트남의 아오자이 디자이너가 만든 아오자이를 동시에 무대에 올리고 싶어한다. 쩐칸번 부사장은 “한국에서 근무할 때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대해 잘 모른다고 느꼈다. 한국의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한류로 한국의 문화가 베트남에 잘 알려진 것처럼 베트남의 문화가 한국에 소개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주간 신문 〈베한 타임즈〉의 김종각 대표(변호사)도 그런 생각을 가진 교민이다. 건설 관련 소송을 전문으로 했던 김 변호사는 2006년 국제적인 건설계약 관리업무 때문에 베트남에 왔다.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컨설팅을 하다가 2010년 호찌민에서 발행하는 교민 신문을 인수했는데, 올해 초 국영 베트남 통신사와 합작해 〈베한 타임즈〉로 재창간했다. 베트남 통신사와 공동으로 한국어 신문을 제작하게 되었다. 베트남 통신사는 프랑스어판·스페인어판·중국어판·일본어판 등을 내는데 한국 교민 신문과 합작해 한국어 신문을 내는 것은 처음이다. 김종각 대표는 “베트남에 진출한 교민과 기업이 많고, 그만큼 위상이 높아졌음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베트남 통신사로서는 한국인들에게 베트남의 문화와 정보를 제대로 알릴 수 있고, 한국 교민으로서는 훨씬 많은 베트남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김종각 대표는 ‘베트남 제대로 알기’ 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국립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학과 협력해 한국인 밀집 거주지역인 호찌민 푸미흥 지역에 베트남 어학 코스를 개설했다. 국립 호찌민 경제대학과 연계해 최고경영자(CEO) 과정도 마련했다.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인이 와서 베트남의 문화·경제·역사를 배운다. 현재 4기 코스를 진행하고 있다.

ⓒ시사IN 차형석이순흥 전 베트남 한인회장은 30년 된 벤츠를 타고 다닌다(왼쪽). 김종각 대표는 국영 베트남 통신사와 공동으로 <베한 타임즈>를 만든다(오른쪽).

김종각 〈베한 타임즈〉 대표는 문화 마케팅 기업인 쥬스컴퍼니와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쥬스컴퍼니는 경북 청송군, 경남 합천군, 충남 아산시, 경남 양산시, 전남 장성군의 지역 문화 마케팅을 담당했던 문화 전문 기업이다. 한국에서 온양 온천시장, 평택 중앙시장, 금산 인삼시장, 수원 못골시장 등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을 진행한 것처럼 베트남에서 전통시장, 수공예마을 등 좋은 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콘텐츠화해서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하려 한다. 〈베한 타임즈〉와 쥬스컴퍼니의 올 프로젝트는 ‘베트남류’를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다. 슈퍼스타 K처럼 베트남 민속음악 콘테스트를 열고, 경쟁을 통해 입상한 이들을 한국에 초대해 공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의 예술 전문가가 수상자를 코치하고, 나중에 이들이 베트남에 와서 상설 공연을 하는 프로젝트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김 대표의 부인인 주은영씨가 호찌민 국립음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서 현지 음악인 네트워크도 탄탄하다. 주은영 교수는 “베트남 고유 문화를 응원하고 이를 콘텐츠화한다면 베트남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한호 쥬스컴퍼니 대표(아시아문화경제연구원 이사)는 “한류가 지나치게 일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문화 교류가 쌍방향이었으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컸다”라고 말했다. 올 가을쯤 ‘베트남류’의 첫 소절을 들을 수 있을 듯하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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