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다. 귀에 익숙한 말이라 당연히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이 속담에 동의하고 살아왔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특히 지방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는 수많은 모임과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그 속에서 때로는 불끈하는 동료 의식으로, 때로는 끼리끼리 동병상련으로, 때로는 속닥속닥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로 이익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 나뉘어 싸우기도 한다.

중소 도시나 지방의 경우 이 문제는 더 심하다. 어떤 이는 모임이 서른 개가 넘는다고 한다. 매일 한 곳씩 모임에 참여한다고 해도 한 달이 부족하다. 왜 이렇게 모임을 많이 가질까? “팔은 안으로 굽잖아요. 서로 알고 지내면 아무래도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모임에 참석해요.”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도, 정치를 하는 사람도 모임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주류 시장이 불야성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 덕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가〈/font〉〈/div〉도의원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현장 민원을 챙겨야 할 일이 많다. 위는 충남도의회 의원들이 4월17일 신도시 건설 현장을 방문한 모습.
ⓒ사진가 도의원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현장 민원을 챙겨야 할 일이 많다. 위는 충남도의회 의원들이 4월17일 신도시 건설 현장을 방문한 모습.

그래서 대한민국의 오늘은 모임의 연속이다. 국민 모두가 천수관음보살이 되어 이곳저곳으로 팔을 벌려 내 사람을 만들고, 내 편을 만들고, 내 이익을 챙긴다.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 속담은 제구실을 하는 것이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 정이 쏠리는 것은 인지상정인 게 맞다.

자치단체장의 ‘팔 안으로 굽기’ 다반사

그러나 문제는 공익을 다루는 일에도 이 속담이 통용된다는 사실이다. 광역의원 생활을 한 지 어느덧 3년이 되어간다. 이런저런 민원이 많다. 동네 정치인이어서 주민들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만나자고 하면 안 만날 도리도 없다.

“맹 의원, 자네 삼촌하고 초등학교 동창인데, 뭐 좀 하나 부탁할게. 음, 안 되는 거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아녀? 참, 선거가 얼마 남았지? 응, 그래. 내가 열심히 도와줄게. 큰 인물 되어야지.” 참으로 난감하고, 참으로 밉다. 나는 이분과 어떤 팔로 연결된 것일까? 내가 이분의 팔 안쪽에 위치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같은 당이 좋은 게 뭐야. 조금은 논리가 부족하고 억지라는 걸 알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도지사만 좋아할 거야. 눈감고 이번에는 이렇게 합시다.” 도민을 위한 판단과 결정보다 진영 논리가 먼저 앞서는 경우도 많다.

특히 자치단체장의 ‘팔 안으로 굽기’는 요가 선수를 뺨친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총동원해 끼리끼리만 편을 만들고, 다른 팔들은 접근할 수 없도록 칸막이를 치고 보초를 세운다. 무리해서라도 자기 일가친척을 먼저 챙기는 인사, 자신의 출신 지역에 과다하게 예산을 투입해 선심을 얻으려는 지연주의,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배려하고, 나와 경쟁하는 학교의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배제하려는 지나친 학연 챙기기가 다반사다.

모이면 모일수록 공동체는 분열하고 갈등하고 대립한다.

여기까지 나가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은 정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편협한 분파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분파주의와 패거리 문화는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내 안의, 내 앞의 사람들에게만 손을 내밀 게 아니다. 뒤돌아서면 나와 달랐던 사람들도 모두 내 팔 안에 있다. 공정과 투명, 공평이 먼저인 공동체가 민주주의 아닐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게 맞을까?

기자명 맹정호 (충청남도의회 의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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