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조정구 구가도시건축 대표 뒤로 아이들이 보였다. 조 대표는 3남1녀를 둔 다둥이 아빠다. 셋째 연우만 유치원에 가고 남우(13)·순우(11)·윤우(6)가 아빠가 지은 집을 구경하러 왔다.

건축주 조욱제씨가 문을 열어주자, 아이들은 쭈뼛쭈뼛 발을 들여놓더니, 곧바로 집을 탐사했다. 처음 와본 집인데, 자기 집처럼 1층과 2층을 오르내리며, 앉아보고 누워보고 열어보며 집을 체험했다.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다락방을 찾아 올랐고, 1층 마당에서 2층으로 난 계단을 오르내렸다. 집짓기 열풍의 진원지가 ‘아이들’이란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건축주 조욱제씨(39)도 아이들 때문에 아파트를 벗어났다. 그는 원휘(10)·준휘(6) 형제를 두었다. 결혼하고 그도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아이들도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맞벌이를 하는 아빠 엄마에게 아파트 살이는 편했다. 관리비만 내면, 특별히 신경 쓸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 아이들에게 아파트는 답답한 평면 공간이었다. 층간 소음 때문에 뛸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맞벌이 부부는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주말 나들이가 대개 그렇듯, 절반을 길에서 보냈다. 주말까지 아이들에게 저당 잡힌 부부는, 아이들은 뛰어놀고 자신들은 쉴 수 있는 ‘진정한’ 집을 원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편했던 아파트가, 아이들이 커가자 불편했다.

부부는 집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일찍 준비를 했다. 변리사(남편)와 금융인(아내)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에 경기도 성남시 판교 택지지구를 일찌감치 샀다. 2008년 판교 단독주택 건축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건축가를 섭외해 설계를 맡겼는데, 이때 조정구 건축가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집을 바로 짓지는 않았다. 조정구 대표가 건넨 5년 전 1차 설계안은 중정을 둔 2층 현대주택이었다. 설계를 받고 조씨는 건축가에게 기다려달라고 했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를 비롯해 수도권 일대 단독주택을 탐방했다. 둘러본 단독주택 집은 하나같이 예뻤다. 딱히 여운이 오래 남는 집은 별로 없었다.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았다. 첫인상은 별로였는데 돌아와 잔상이 오래 남는 집이 있었다. 서울 종로구의 낡은 북촌 한옥이었다. 조씨는 “돌아와서 한옥의 기와지붕 선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조씨는 조정구 대표에게 설계 변경을 요구했다. 두 가지였다. 첫째, 남향으로 마당을 만들어달라. 둘째, 집 일부를 한옥으로 지어달라. 조정구 대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 대표는 2002년 북촌 한옥마을 재개발에 참여했고, 2005년 경주에 국내 최초 한옥호텔 ‘라궁’을 설계해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2007년)을 받은 도시 한옥 전문가이다. ‘한옥 전문가’ 앞에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0년 자신의 이름 끝자를 따서 ‘구가도시건축’을 차린 조 대표는, 대형 건축보다는 삶이 녹아 있는 근린생활시설과 다세대주택 전문 건축가를 표방했다. 2000년 11월부터 매주 수요일 답사를 떠났다. 삶이 녹아 있는 주택이 많은 서울 북촌, 청계천부터 경북 경주 일대까지 10년 넘게 매주 발품을 팔아 사진을 찍고 글을 남기고 실측을 하며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수요 답사를 하며 그는 대청에 유리문이 달리고 처마에 함석 챙을 잇댄, 이른바 ‘집장사 한옥’의 매력에 빠졌다. 건축가들이 경원시하는 이런 구옥을 재해석한 그는 경주 라궁호텔, 서울 구로구립 글마루한옥어린이도서관 등을 선보이며 조정구표 도시 한옥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그 자신도 2003년 서울 서대문에 있는 50년 된 도시 한옥으로 이사해 네 아이와 부대끼며 살고 있다.

잔디 깐 ‘관상용’ 마당은 필요 없다

그런 건축가였기에 마당과 한옥을 요구한 건축주의 요구는 반가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 건축주는 따로 떨어진 한옥이 아니라 바로 붙은, 그러니까 집 안으로 들어오는 한옥을 바랐다. 도시 한옥 전문가인 건축가도 처음 시도하는, 일부만 한옥인 하이브리드 주택이었다. 집 형태는 북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ㄱ자형인데, 한 축만 한옥이고 나머지는 현대식 주택이었다. 경골 목구조 현대주택과 도시 한옥을 이어 붙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이 나온다. 소파가 놓인 거실을 지나면, 한옥 가족실이 나온다. 거실과 한옥 가족실 사이에 문턱을 둬, 오르면서 공간을 구분 짓는 효과를 냈다. 한옥 가족실은 좌식 휴게 공간이다. 누워서 천장을 보면 노출된 서까래의 아름다운 선을 볼 수 있다. 가족실 뒤로 부부침실을 배치했다. 한옥 부분의 창을 모두 마당으로 내어 침실에서든, 가족실에서든 마당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이 집의 포인트는 2층에 있는 아이들의 놀이방이다. 이곳에서 창을 열면 한옥 기와지붕 선과 마당이 한눈에 펼쳐진다. 대지가 225㎡(68평)인데 마당이 46㎡(14평)이다. 대지의 20%를 마당으로 비운 것이다. 보통 건축주들은 땅 값이 아까워서라도 대지를 꽉 채워 집을 지어달라고 요구하는데 건축주 조욱제씨는 남향으로 난 큰 마당을 바랐다. 집 밖에서는 주변 판교 주택과 별 차이가 없는 붉은 벽돌집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북촌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비워진 공간, 마당 때문이다. ㄱ자 가운데를 차지하는 마당을 마주보고 대청마루에 해당하는 거실을 배치했다. 그 사이를 통유리로 설치해 마당과 통하게 했다. 한옥과 맞닿아 붙은 현대주택도 한옥의 개념을 차용한 공간 배치를 한 셈이다. 거실(마루)의 통창을 여니 마당이 거실이 되었다. 비워서 오히려 집이 더 커진 것이다. 열 살, 여섯 살 형제가 자전거도 타고 맨발로 뛰어다니고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도록 마당에 석재를 깔았다. 대개 마당에 잔디를 까는데, 깔고 나면 마당이 그저 관상용으로 그치고 만다. 3남1녀를 둔, 아이를 키워본 아빠 건축가는 쓰임새를 따져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었다. 건축가 조정구씨는 밝음을 안고 있는 마당에 착안해 이 집을 ‘함양재’라고 이름 지었다.

지난 2월 함양재에 입주한 건축주 조욱제씨는 퇴근이 빨라졌다. 그는 “이상하게 이 집에 이사 와서는 늦게 술 먹고 택시 타고 들어오는 게 미안했다”라고 말했다. 조씨는 되도록 일찍 퇴근해 아이들과 놀아준다. 아파트에서 뛰지 못했던 아이들은 이제 다락방·마당·놀이방 등을 뛰어다니며 자기들끼리 숨바꼭질을 한다. 조씨는 “아이들을 돌볼 일이 줄어들어 엄마 아빠가 편해졌다. 또 하나 더 이상 주말 나들이를 강요당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조씨는 최근 주말 밤에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대문에 스크린을 걸어 아이들에게 만화영화를 보여준 것. 함양재의 마당 한쪽에는 흰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배롱나무는 여름에 흰 꽃을 피우는데, 꽃이 피면 조씨는 아이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 마당 영화제를 열 계획이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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