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 때문이었다. 열여섯 살 때 채식을 시작해 20년간 우유·달걀은 물론 어떤 동물성 단백질도 멀리하는 비건(vegan·엄격한 채식주의자)으로 살았다. 단백질을 먹고 싶은 감정마저 ‘동족 살해’와 맞먹는 끔찍한 범죄로 느꼈을 정도다. 환경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미국인 리어 키스의 이야기다. 그에게 채식은 생활이라기보다 종교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돌연, 육식을 선언했다. 키스는 채식 때문에 심각한 퇴행성 관절질환을 얻고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때는 신봉했던 채식의 환경적·도덕적·영양학적 근거를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책의 원제는 ‘채식의 신화(The Vegetarian Myth)’. 최근 한국에서 〈채식의 배신〉으로 번역됐다.

그는 채식주의자가 찾는 일년생 곡물의 경작이 생태계의 파괴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농업을 위해 밀어버린 목초지의 동물이 전멸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양 면에서는 저지방·고탄수화물 식단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단백질 덩어리로 알려진 콩 속에 갑상선종 유발물질이 들어 있다고 경고한다. 이 책을 국내에서 출간한 출판사 ‘부키’의 임종민  편집자는 “채식에 대한 찬반을 떠나 논의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채식 관련 카페에는 이 책을 두고 채식주의를 방해하는 ‘교란자’라는 비난에서부터 채식 자체보다는 극단적으로 질이 낮은 채식을 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까지 다양한 의견이 올라왔다. 비건이었던 저자의 경험담 앞에 불안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채식주의의 윤리적 당위성을 다룬 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를 펴낸 ‘사월의 책’ 안희곤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반대 논지의 책이라고 해서 어떻다기보다 사실 반갑다. 이런 논쟁이 더 많이 벌어져야 한다”라고 밝혔다(채식, ‘왜 식물은 되고 동물은 안 될까?’ 기사 참조).

키스와 채식주의자의 동일한 문제의식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태근본주의를 지향하는 키스의 고민은 채식하는 이들의 생각과 겹치는 대목이 많다. 많은 채식주의자들의 동기가 되는 공장식 사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렇다. 대규모 농업 역시 그 경작물이 항생제와 섞여 주로 동물의 값싼 사료로 쓰인다는 점에서 채식주의자들은 키스와 마찬가지로 반대한다. 식탁의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비슷하다.

추정되는 국내 채식 인구는 1% 남짓, 약 60만명이다. 환경·윤리·건강·종교 등 이유와 정도도 각각 다르다. 구제역 등으로 윤리적 관심이 늘면서 채식하는 이들의 고민도 다양해졌다. 쇠고기 파동을 즈음해 채식을 시작했다가 2년여 만에 중단한 김중현씨(가명·31)는 처음에는 쇠고기·돼지고기만 안 먹는 세미베지테리언(semi-vegetarian)이었다가 나중에는 닭·생선까지 꺼리게 됐다.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지다 보니 채식 생활 자체가 스트레스가 됐다. “채식은 남들 앞에 하는 선언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가치에 따라 삶을 조절하는 행위인데 어느 순간 전자가 목적이 되었다. 달걀과 우유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조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해지더라.”

10개월째 채식을 하는 고귀현씨(27)는 1년에 두어 번 해외여행을 할 때 스스로에게 ‘자유식’을 선포한다. 육식을 허용하는 것. 여행의 묘미 중 하나가 먹는 거라고 생각한다. 꺼려지는 건 없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시작했다. 나는 채식이 생활습관 중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지키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일 뿐이다.”

최훈 강원대 교수는 본인을 반쪽짜리 채식주의자라고 소개한다. 고기류 중 물고기는 먹는다. 그는 사육과 도살 과정에서 동물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육식을 반대한다. 백흥선씨(가명·58)는 스스로 고기 파는 식당을 가지는 않되, 여럿이 가자면 간다. 그래서 스스로 ‘소극적 채식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나름의 기준과 방식에 따라 채식을 시도하는 셈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채식문화를 다루는 월간지 〈비건〉은 요즘 육식을 끔찍한 것으로 그리지 않으려 애쓴다. 거부감 때문이다. 잡지 이름처럼 비건인 이재향 편집장은 “대량생산을 위해 왜곡되는 축산업이 문제이고 그걸 지탱하는 ‘너무 많은 소비’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명품백 팔아 〈비건〉 잡지 만드는 여자 기사 참조).

윤한결씨(24)도 2년간 하던 채식을 중단했다. 고기의 유통방식에 의문을 품고 채식을 시작했지만 바뀌는 게 없는데도 스스로 위안 삼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 “채식보다 중요한 건  고기 생산과정에 대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채식의 배신〉이 화제가 되는 것 같다. 식습관을 선택하는 건 삶의 장치를 조절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채식은 유동적일 수 있다”라고 윤씨는 말했다.

취재 도움:조소희 인턴 기자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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