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논쟁적인 정치인이 가장 조용하게 ‘직업 정치’를 떠났다. 유시민 전 장관이 2월19일 트위터에 글을 올려 정계 은퇴를 알렸다. 보도 자료도 기자회견도 없었다. 정치인 중 글과 말을 다루는 능력에서 손에 꼽혔던, 2002년 정치 입문 이후 날 선 텍스트를 쉴 새 없이 생산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단 세 문장으로 은퇴를 알렸다. “너무 늦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 떠난다”라는 내용이다.

유시민의 가장 유명한 별명은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흔들릴 때 그를 지키겠다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재신임 정국, 탄핵 소용돌이, 열린우리당 핵분열 등 굵직한 변곡점마다 대통령 노무현을 육탄 방어했다. 그 때문에 유시민의 정계 은퇴를 다룬 기사 대부분은 그의 정치 인생을 ‘노무현 코드’로 읽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유시민은 대선주자로 거론된 정치인 중 최초로 스스로를 ‘리버럴’로 규정한 인물이다. 익숙한 진보·보수 구분법과는 결이 다른, 한국판 리버럴의 등장을 알리는 뚜렷한 상징이 유시민이었다. 유시민의 10년 정치 여정은 리버럴이라는 신흥 정치블록의, 그리고 그에 기댄 친노 세력의 도전과 좌절을 보여주는 압축파일이다. 정치인 유시민을 평가할 때 ‘리버럴’은 ‘노무현’만큼이나 중요한 코드다.

참여 강조하며 ‘조직과 동원’ 경시

정의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리버럴은 흔히 미국 민주당 지지층의 주류를 부르는 명칭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도시 중산층이 리버럴의 주력이다.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 문화적으로는 다원주의 성향이 확고하고, 경제적으로는 시장 지상주의보다는 개입주의에 가깝다. 여기서 고전적 자유주의자와는 결이 달라진다. 또한 리버럴은 조직노동과 같은 고전적인 진보 의제에도 냉소적이다. 이렇듯 ‘자유주의’도 ‘진보주의’도 딱 들어맞는 번역이 아니어서, 번역 없이 ‘리버럴’로 부르는 학자들이 제법 있다. 

노무현 열풍이 불어닥쳤던 2002년에 유시민은 평론가 생활을 접고 직접 정치에 뛰어든다. 그 해는 한국의 리버럴이 ‘노사모’라는 이름으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던 해다. 고도성장기 이후에 성인이 된,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이 유권자 집단으로 막 결집하던 시기다. 윗세대보다 개인주의·다원주의 성향이 눈에 띄게 강했고, 진보색은 짙었지만 대공장 노조를 주축으로 하는 조직노동 노선에는 시큰둥했다.

노무현 후보는 전통적인 지역 기반에다 리버럴을 연합해내는 데 성공하면서 대통령이 된다. 노 대통령은 정치 참여 열망이 강한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을 ‘깨어 있는 시민’이라 즐겨 불렀다. ‘깨어 있는 시민’은 지금도 친노 정치인 사이에서 한국 정치의 혁신을 가져올 성배 대접을 받는다. ‘친노’라는 정치 엘리트 그룹을 리버럴 성향으로 묶을 수 있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유시민은 독특하다. 그는 마치 실험실에서 전형적인 리버럴의 속성만 정제해서 추출해낸 것 같은 정치인이다. 친노 정치인 대부분이 정치현실 속에서 이런저런 연합을 거치며 형성된 복잡한 정치 궤적과 지지기반을 가졌다면, 유시민은 그런 정치연합을 거의 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배척해왔다. 그가 만든 2002년 개혁당과 2010년 국민참여당은 마치 쌍둥이 같은 리버럴 정당인데, 순수 리버럴 정당을 두 번 만든 정치인은 그가 유일하다. 국민참여당 창당 당시 그를 만류하던 친노 주류는 ‘혁신과 통합’을 거쳐 민주당과의 통합을 택하며 리버럴 단일 노선을 기각했다. 유시민은 끝까지 합류를 거부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의 최전선에도 유시민이 있었다. 열린우리당은 리버럴이 주류를 차지한 최초의 집권당이었다. 창당 과정에서 호남 지역 기반을 의도적으로 떨어내다시피 했다. 당시 유시민은 “민주당 구주류는 생각이 너무 달라 같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라고 말했는데, 다수파연합 만들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인의 말은 분명 아니다.

청와대를 접수한 가운데 국회마저 과반 의석을 확보한 2004년은 한국 리버럴의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유권자 지형에서 리버럴이 단일다수파가 되었다는 뜻이 전혀 아니었다. 대선 당시의 호남·리버럴 연합에서 호남이 이탈하고 수도권 40대가 등을 돌리자, 리버럴이 단일 세력으로는 다수파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열린우리당은 총선 이후 모든 선거에서 참패하더니 2007년 핵분열을 겪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시민은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 야권 대선주자 중 선두로 떠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지지율은 10%대 초반에 그쳤다. 30%를 넘나들던 박근혜와는 차이가 컸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었다. 첫째, 친노 지지기반의 핵심인 리버럴은 자신들의 대변자로 ‘불순물 없는 리버럴’ 유시민을 우선 선호했다. 둘째, 그런 리버럴 만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했다.

왜 그럴까. 친노 정치인들의 바닥 정서를 보면 단서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노 대통령의 생전 어록 중 하나다. 이 말의 해석은 ‘깨어 있는 시민’과 ‘조직된 힘’ 중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친노 정치인들은 ‘깨어 있는 시민’에 압도적으로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시민 계몽 프로젝트다. 논리는 이렇다. 시민이 각성하면 정치 참여 욕구가 발생한다. 이때 정치권이 할 일은 각성한 시민이 좀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의 문턱을 낮춰주는 것이다. ‘각성’이 확산되고 문턱이 충분히 낮기만 하면, 깨어 있는 시민이 당내 경선과 본선 모두에서 다수파가 될 수 있다.

그 논리적 귀결로, 친노 정치인들은 대체로 영남 지역주의 투표 행태를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한창 전투적이던 시절의 유시민은 “영남의 지역주의 정서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질환 수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강준만 교수나 고종석 칼럼니스트 등 몇몇 호남 출신 오피니언 리더들은, 친노 엘리트들이 호남 유권자에 대해서도 보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비슷한 관점(지역주의 투표 행태에 대한 은밀한 혐오)을 갖고 있다고 끊임없이 의심했다. 이런 갈등은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을 거치며 극적으로 폭발했다. 이후 호남은 리버럴 주도 다수파연합에서 이탈했다.

리버럴을 포함한 야권 연합 가능할까

깨어 있는 시민(즉, 리버럴) 단일다수파의 꿈. 친노 정치인들은 많든 적든 이 꿈을 공유하는 그룹이었다. 2003년 열린우리당과 2010년 국민참여당은 둘 다 ‘참여의 문턱 낮추기’를 상징하는 이름을 내걸었다. 그것이 정치 혁신과 집권의 열쇠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참여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 각성한 시민의 자발적 참여다. 리버럴이 선호하는 경로다. 둘째, 정치적 리더십의 조직과 동원이다. 리버럴은, 그리고 친노 엘리트는 이를 구태정치로 본다. 정치인 유시민이 본인의 사명으로 내걸었던 정당 개혁의 핵심 내용도 조직과 동원을 척결하고 자발적 참여로 움직이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실정치에서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2011년 당시 참여당과 민주노동당의 합당을 추진할 때에도 ‘당원 중심의 민주적 정당 문화’를 통합 명분으로 내걸었다.

리버럴 특유의 사고 구조에서, ‘시민의 자발적 각성’과 ‘정치 리더의 조직과 동원’ 둘은 대립항에 가깝다. 리버럴은 전자를 혁신으로 후자를 구태로 본다. 하지만 고학력 도시 중산층과 달리 ‘보통의 유권자들’은 일상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투자할 수가 없다. 스마트폰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관심’이란 결국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보다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자원인데, 여기서 학력과 자산은 차이를 가르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리버럴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교육 수준에 따른 투표율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 ‘자원의 불평등’을 메우는 것이 정치 리더의 조직과 동원이다. 리버럴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친노 정치인들은 대체로 이 대목에서 무능했다. 문성근 전 최고위원이 ‘모바일 투표와 풀뿌리 조직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내놓았지만 구체적인 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는 지리적으로 지방에 대한 대도시의 고립으로도 나타났다. 지난해 총선과 대선의 여야 득표 구조를 보면, 지방이라는 망망대해에 서울 등 대도시들이 외롭게 떠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야권은 고학력 도시 중산층 밀집 지역에서는 해볼 만한 승부를 벌인 반면 호남을 제외하고 ‘보통의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참패했다.

정치인의 구실을 시민의 각성과 참여를 돕는 데 한정하는 리버럴의 바탕 정서는 유시민의 정치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유시민은 정치적 스킨십이 특히 취약했다. 무관심하기도 했다. 정치의 본령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열린우리당 시절 그는 ‘설렁탕 한 그릇 안 사주는 정치인’으로 통했다.

지역구와 조직 관리도 그의 전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시 무관심에 가까웠다. 지금은 함께 진보정의당에 몸담고 있는 심상정 의원이 2008년부터 출마한 지역구(경기 고양 덕양갑)는 그 전에 유시민이 재선한 지역구다. 심 의원은 2008년 자신의 책 〈당당한 아름다움〉에서 이렇게 썼다. “유시민 의원이 4년 동안 지역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많이 나오는 사람들은 지역구 신경 안 쓰더라는 네거티브가 바닥 민심에 고였다.”

유시민만큼 전폭적 애정과 격렬한 증오를 동시에 받는 정치인도 흔치는 않다. 현실정치에서 다수파연합을 만드는 대신 리버럴 단일다수파의 꿈을 추구해온 덕분에, 지지층의 동질성이 높은 반면 반대파 역시 강고하다. 적지 않은 친노 정치인들도 이런 그를 ‘일탈’이나 ‘예외’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유시민이 다른 친노 정치인들과 비교해도 유난히 튀어 보이는 이유는, 그가 친노의 ‘예외’가 아니라 ‘극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질적 세력(주로 호남 기반 세력이었다)과의 연합과 리버럴 독자노선 사이의 선택에서 그는 늘 후자를 골랐다. 리버럴 중에서도 가장 확신에 찬 그룹은(정확히는 오직 그 그룹만이) 그에 대한 전폭적 지지로 응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 유시민은 민주당을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가 된다. 리버럴은 이미 민주당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범 친노그룹은 주로 리버럴의 힘에 기대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당내 주류로 떠올랐다. 모바일 투표라는 ‘참여의 문턱을 낮춘’ 기술 덕을 크게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2012년의 두 선거는 ‘리버럴 단일다수파’라는 친노 정치인들의 오랜 꿈을 다시 한번 후퇴시켰다.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한국에서 새누리당에 맞설 대안 정당의 재료가 될 만한 후보군은 호남, 조직노동 그리고 리버럴이다”라고 말했다. 리버럴이라는 나름 공고한 신흥 정치블록을 노무현 향수와 함께 사라질 ‘노빠’로 치부하는 것도, 언젠가 단독 다수파가 될 ‘깨어 있는 시민’으로 마냥 찬양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야권 내에서는 상당히 강력하지만 단독으로 집권하기에는 벅찬 리버럴을 하나의 정치적 축으로 인정하고, 그를 포함하는 안정적인 다수파연합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