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어느 행사장에서 한 학부모가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파출소를 신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지방자치단체의 업무가 아니긴 하나, 나는 이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그러잖아도 내가 주최하는 〈원룸 생활 개선 주민토론회〉가 얼마 뒤 잡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치안에 대해 이렇게 결론이 모아졌다. 첫째, 범죄 예방이 중요한데 폐회로TV(CCTV) 설치 등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둘째, 치안은 복지나 문화와 함께 나아지는 것이므로 당장의 획기적인 해결책은 없다. 셋째,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 동네 실정상 파출소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

치안 공백이 우려되는 구역의 학부모들, 지역의 자율방범대와 시민단체, 그리고 애로사항 많은 일선 경찰관들을 면담하면서 파출소 증설이 필수불가결한 일임을 재확인하고, 관련 법률과 전례를 검토하며 청원서 양식을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점점 더 의문이 커져갔다. 지역 국회의원은 재임 기간이 8년에 이르도록 무엇을 했나? 지역 유지들도 이 과제를 숙원사업으로 다루지 않았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청원운동을 시작할 때도 “파출소 신설? 택도 없다 카던데” “기관장들 다 모셔서 추진위부터 꾸려서 와요” 같은 냉소주의와 관료주의에 직면했다. 화가 난 나는 그날로 합의된 주민들끼리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기초적인 치안마저 외면하는 보수


마침 겨울이 다가와 거리 서명을 두 차례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미동 자율방범대원들과 천생초등학교 학부모들과 내가 발품을 팔아 알음알음 받아온 서명은 본격적으로 청원운동을 공언하기도 전에 3700명에 달했다. 목표인 1만명을 채울 수 있는 토대였고, 뒤로 물러나 있던 주민을 설득할 근거였다. 설명을 듣고 이의를 제기하는 주민은 거의 없었다. “김 의원이 아이템 잘 잡았다”라는 소리도 들었다. 봄에는 총선 후보자들에게 정책 제안도 했다. 3명이 수용 의사를 밝혔고 그중 야권 단일후보는 공보물을 통해 공약했다. 결과는 응답 안 한 후보가 당선됐지만 주요 의제로 올리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그즈음 최종 성사가 성큼 다가왔다. 동네 여론도 여론이거니와 경찰 내부에서의 건의가 크게 작용하면서 파출소 증설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계속 서명을 받아야 하는 부담을 덜어 홀가분한 동시에, 청원을 제출하고 나서 정부의 ‘수리’ 답변을 듣는 짜릿함을 경험하지 못해 아쉬웠다. 사실 과제가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다. 공무원 정원이 강고히 묶인 탓에 우리 동네를 담당하는 경찰 인력이 늘어나는 건 당분간 어려울 전망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참여 주민들이 얻은 자신감은 만만치 않았다. 의원의 권한 범위를 떠나 풀뿌리운동가의 심정으로 함께 나선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돌아보면 그 전에도 그랬다. 주민들은 어떠한 원내 활동보다 단수 피해 시민소송단 모집이나 경상북도 친환경 무상급식 조례 주민발의운동 같은 일에 더 크게 호응했고 내 보람도 그때 더 컸다.

파출소 증설 청원운동 과정에서 나는 현재의 시대정신이 ‘안전’임을 깨닫기도 했다. 만성적 경제위기와 만연한 폭력 속에서 주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안전’이었다. ‘보편적 복지’도 그러한 맥락에 포함되어 있으며, 무상급식 때문에 학교 안전을 위한 예산이 줄어든다고 호도했던 자들도 이 점에 발 디뎠을 것이다. ‘안전’은 보수적 가치일까? 글쎄. 나는 파출소 증설처럼 기초적인 대책마저 등한시하는 ‘보수 세력’을 보았고, 절대 다수의 주민이 필요로 하는 사업을 앞장서서 추진하는 ‘선진 주민’ 또한 겪었다. 로컬 푸드, 도시 농업, 공동 육아, 탈핵, 비정규직 차별 폐지, 의료 공공성 강화 등을 곱씹어보라. 장담하건대 ‘안전’은 위기의 진보 진영에게 주어진 돌파구가 될 것이다.

기자명 김수민 (구미시의회 의원·녹색당+, kimsoomin.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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