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내린 비가 ‘멍텅구리배’(무동력 새우잡이 배) 바닥을 가득 채웠다. 1월23일 오전 9시, 하얗게 말라버린 굴 껍데기 무덤에서 이근주씨(70)가 배에 올라 바가지로 빗물을 퍼냈다. 지난 일주일간 애써 캐놓은 굴이 비바람에 망가지지나 않았는지 살피러 나온 터였다. 아내와 둘이서 공을 들였는데도 그물 10개를 채우지 못했다.

2007년 12월7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도 해상에 정박해 있던 홍콩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삼성1호가 충돌했다. 기름은 인근 해안을 모조리 덮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흘러 기자가 찾은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개목항은 한적함을 넘어 스산했다. 수십 년 동안 쌓인 굴 껍데기가 무덤을 형성했다. 바닷물이 빠진 펄에 멍텅구리배 10여 척만 아무렇게나 정박돼 있었다. 300ha에 달하던 굴 양식장은 없었다. 서해안 중에서도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 굴 양식장으로써 으뜸이었다. 이씨는 “의항리에 사는 사람치고 굴 양식 안 한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검은 기름이 이곳을 덮치기 전까지만 해도, 가을에 수확한 굴을 겨우내 까기 바빴다.

사고가 일어나자 굴 양식장은 곧바로 철거됐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굴은 살이 너무 크지도 않고 향도 좋아, 김장철에 제법 인기가 높았다. 이젠 옛말이다. 기껏해야 바위에 붙은 굴을 호미로 캐는 게 전부다. 이씨가 이날 오전 손질한 굴은 5년 전 양식장을 철거하면서 떨어진 굴이 살아남은 것이다.

지난 1월16일 대전지법 서산지원은 기름 유출 사고에 따른 피해금액이 7341억원이라고 사정재판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주민들의 직접 피해금액은 4138억원이다. ‘사정재판’이란 정식 민사소송에 앞서 손해 금액을 따져보는 예비 재판이다.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 펀드)의 사정 결과로 나온 피해금액 1824억원을 초과하는 액수다. IOPC 펀드와 주민들이 이의신청 없이 받아들이면, 이씨도 약 1500만원을 배상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5년 만의 결정이 달갑지만은 않다. 배상을 받더라도 굴 양식의 경우 10년 가까이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당장 회복하기 힘든 데다, 틀어진 주민들 인심 때문에 마음 상한 일이 여러 번이어서다.

지난봄, 주민 10여 명은 어촌계 소속 양식장과 별개로 영어조합법인을 만들었다. 시범적으로 굴 양식장을 차린 것이다. 그간 굴 양식장이 없어진 자리에는 바지락이 무성해졌는데, 굴 양식이 시작되면 굴의 독한 성분 때문에 바지락이 나지 않는다. 고령인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바지락을 캐고자 했다. 한 마을에서 서로 다른 움직임을 보이자 불화가 생겼다. 문성호 의항2리 어촌계장은 “어촌계원 중에는 굴 양식업자들이 기존 배상금과 굴 양식 수익, 거기에 수산연구소 지원비까지 받아 운영한다며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5년 전 분신한 지씨 배상금은 ‘0원’

바다를 끼고 사는 주민들은 물때가 되면 호미를 챙겨 미역·다시마·조개 등을 캤다. 피해 주민이 법원에 신청한 피해 사례 12만7000여 건 중 맨손 어업이 9만 건에 달할 정도로 누구에게나 용돈벌이가 됐다(태안군의 경우 2만6000여 건 중 맨손 어업 1만1000건, 어선 1100건, 양식업 600건, 요식업 530건, 숙박업 1700건 등이다). 의항2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홍 아무개씨(71)는 1000만원 남짓 맨손 어업 보상금이 책정됐다. 이날 마을회관에 있던 노인 10여 명의 말을 종합하면, 맨손 어업 종사자들은 홍씨처럼 평균 1000만원가량 보상금을 인정받았다. 이들은 “확정된 대로만 지급되면 이의 제기할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먼 바다에 나가 조업하면서도 어획량이 적었던 어민들 사이에서 보상금 차이를 두고 볼멘소리가 터졌다. ‘수협에 이자 내고 장비값, 기름값, 인건비가 드는데 맨손 어업에 비해 보상비가 턱없이 적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상금 600만∼3000만원이 책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마을에서는 선주회의가 열리는 중에 임원과 주민들 간에 큰 소리가 오가기도 했다. 이 아무개씨(52)는 “어촌 축제, 체험 사업 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도 더 이상 보상 이야기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를 접고 미래를 내다봐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보상 이야기를 꺼낼수록 기름 유출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어떻게든 임원들이 보상금액이 적은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 이의 제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의 중에 박 아무개씨(43)는 “맨손 어업 노인들은 몸에 금가루라도 뿌렸느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는 몇 푼이라도 보상을 받은 주민들만의 ‘행복한 갈등’인지도 모른다. 개목항에서 차로 30여 분 떨어진 태안읍 시내 조석시장. 즐비하게 들어선 횟집 25곳 대부분은 배상금이 인정되지 않았다. 2008년 1월, 기름 유출 사고 이후 생계를 비관하던 지창환씨는 ‘태안반도 기름유출피해 특별법 제정을 위한 대정부 촉구대회’ 현장에서 제초제를 마시고 분신했다. 당시, 지씨를 포함해 기름 피해에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는 모두 4명이었다. 지씨의 아내 최 아무개씨(57)는 부부가 운영하던 ㅁ횟집의 피해 금액을 2억6000만원이라고 신고했다. 하지만 최씨가 손에 쥔 법원의 검증서에는 ‘사고와의 업종형태별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최씨는 “기름 유출 사고로 관광객이 줄어 매출이 감소했는데 법원은 관계가 없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태안군 여덟 개 읍(면) 가운데 태안읍의 경우, 최씨처럼 피해를 신고하고도 배상금을 인정받지 못한 주민이 2506명이다. 전체 3605명 가운데 70%다(태안군 전체로는 총 5000여 명이 보상을 받지 못했다). 횟집, 펜션 등 ‘비수산’으로 분류된 분야에 대한 인정금액은 수산 분야의 12%에 불과했다.

배상 문제에 대한 불만은 사고 책임자인 삼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서해안유류피해민총연합회 문승일 사무처장은 “악천후에 무리하게 운항을 하다가 사고를 저질러놓고 벌금 56억원만 내놓고 만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혀를 찼다.

기름 유출 사고 직후부터 삼성 직원들 상주

태안 버스터미널 인근 건물 2층에 위치한 ‘삼성중공업 사회봉사단’ 사무실에는 직원 3명이 상주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태안사무소 김기용 차장은 “실질적인 보상 책임이 우리 쪽에는 없다. 다만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2007년 12월부터 상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의 ‘도의적인 책임’은 매년 100억원씩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투입하는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피해 지역 18곳과 자매결연도 했었다. 삼성이 지은 의항2리 마을회관에는 삼성 상표가 달린 냉장고, 에어컨, 청소기, 선풍기, 전자레인지 등 물품이 비치되어 있었다. 삼성은 이 밖에 1800억원의 지역발전 기금을 출연해 피해 어민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어민들은 최소 5000억원의 기금과 함께 삼성 측의 추가적인 ‘지역 공헌’을 요구한다.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데 견주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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