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집을 비우라
  • 고제규 기자
  • 호수 275
  • 승인 2012.12.29 14: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종국씨의 집을 들여다보면 실속 있는 집짓기를 할 수 있다. 원룸 형이라 건축비를 크게 아꼈고, 슬라이딩 도어를 이용해 거실과 침실을 나눴다. 그의 집에는 비우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주소를 보니, 서울 금싸라기 땅이었다. 강남구 역삼동. 으리으리한 집이 떠올랐다. 선입견부터 들었다. 지하철 7호선 신논현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강남 한복판이라 여겼는데, 가파른 길을 오르니 주택가는 조용했다.

경사지에 자리 잡은 주택. 순간 선입견이 깨졌다. 번쩍번쩍한 대리석도, 눈에 띄는 형형색색 마감재도 없이 첫인상은 그냥 담백했다. 마감재를 따로 쓰지 않고,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낸 집이었다.

건축주는 2008년 은퇴한 예종국씨(58). 대전이 고향인 그는 결혼하고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예씨의 자녀는 셋. 두 딸을 시집보내고, 대학원에 다니는 막내아들과 함께 세 명이 산다. 은퇴 뒤 인생 2막을 고민하던 그는 아파트 생활도 은퇴했다. 1982년에 사두었던 땅에 지난해 집을 지었다. 그는 대기업에서 건축 일을 했다. 대검과 고검 청사를 시공한 책임자였다. 건축가를 비롯한 장인들에게는 ‘영업 비밀’이 하나 있다. 자기가 살 집에는 절대 큰돈을 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로라하는 건축가 대부분이 아파트에 산다.


독자들은 이 집에서 금싸라기 땅은 빼고, 집의 형태와 개념을 이해하면 실속 있는 집짓기를 할 수 있다. 아주 경제적인 집이기 때문이다. 보통 단독주택의 경우, 3.3㎡당 건축비가 500만∼600만원을 훌쩍 넘기는데, 이 집은 평당 건축비가 350만원 안팎이었다. 지하 차고를 비롯해 2층 집인데, 땅은 대지 약 300㎡(90평), 지하 차고까지 합치면 건축 연면적은 약 330㎡(100평) 안팎이다. 1층과 2층은 각 35평씩 똑같은 구조다. 땅값을 제외하고 건축비가 3억5000만원 안팎이 들었다. 예씨는 전에 살던 아파트를 팔고도 돈이 남았다.

“이 집은 열려 있는 집이다”

경제적인 집짓기가 가능했던 것은 예씨가 건축 판에서 살아 비용을 아끼는 노하우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씨의 특수한 상황이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이제부터 독자들이 주목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 이 집의 형태이다. 이 집은 원룸 형이다. 직사각형으로 외벽 외에 집 안에 벽이 없다. 침실 옆 벽 하나만 고정 벽이다. 보통 집 안에 벽을 많이 세워 방을 나누면 건축비가 많이 든다. 그에 비해 원룸 형은 건축비를 크게 아낄 수 있다.

설계는 김개천 국민대 교수가 맡았다. 10월3일 개천절에 태어나, 부친이 지은 이름 덕을 톡톡히 보는 김 교수는, ‘선(禪)의 건축가’로 유명하다(휴대전화 번호가 1003이다). 건축가로서 이례적으로 동국대 선학과 철학 박사를 수료했다.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 전남 담양 정토사 무량수전, 서울 양천구 국제선센터 등 비우는 건축을 잇달아 선보였다. ‘전통의 현대화’가 아니라, ‘현대의 전통화’를 추구하는 김 교수는 이 집을 “열려 있는 집”이라고 정의했다.


집은 침실과 부엌·거실·욕실 등 꼭 필요한 공간만 담았다. 침실과 거실의 경계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슬라이딩 도어 때문이다. 슬라이딩 도어를 닫으면 침실과 거실은 나눠져 순간적으로 曰 형태의 가운데 벽이 생긴다.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벽은 사라지고 침실과 거실은 서로 열려 있다. 마치 병풍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형태다. “벽은, 평면은 이 집에서 순간적으로 존재한다”라는 김 교수의 말을, 거실에 앉아 있으면 느낄 수 있다.

거실 밖으로 보이는 담도 최소화

거실 외부 벽도 닫히지 않았다. 통창을 내 시선을 밖으로 열려 있게 했다. 창을 통한 빛의 변화도 느낄 수 있다. 흔히 창을 크게 내면 단열에 문제가 생긴다는 선입견이 강하다. 옛날 말이다. 요즘은 3중창 등 재료가 좋아져 난방에 문제가 없다. 기자가 찾아간 날, 눈이 내리고 추웠는데, 바닥은 설설 끓었고 외풍은 없었다. 보일러 온도를 21℃로 맞춰 놓았는데도 따뜻했다. 통창은 공간 확장 효과까지 냈다. 통창을 통해 거실은 밖으로 넓어졌다. 부인 강옥진씨(60)는 “창을 통해 집 밖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예전에 살던 아파트 크기(50평대)보다 더 넓은 데 사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거실 밖으로 보이는 담도 최소화했다. 담은 한쪽만 세웠다. 한쪽은 담을 세우지 않고 뒤쪽 집 담 밑에 측백나무만 심었다.


1층과 똑같은 구조를 가진 2층은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이 쓴다. 예씨는 결혼을 해도 아들을 데리고 살 작정이다. 일부러 계단을 밖으로 따로 냈다. 나중에 세를 주어도 된다.

“건축가는 원룸 구조로 설계한 건축물로 기억된다(건축가 에리히 멘델존)”라는 말이 있다. 군더더기 없는 작은 집 설계에서 건축가의 내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원룸 형태의 이 집도 김개천 교수의 ‘비우며 채우는 철학’이 배어 있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미스 판 데어 로에는 “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라는 말을 남겼고, 서울대 미술관을 설계한 렘 콜하스는 반대로 “많을수록 좋다(More is more)”라고 말했다. ‘열려 있는 집’에 드러난 김개천의 색깔은 “적지만 풍부하다(Less But More)”이다. 벽을 드러내고 공간을 드러내니 거꾸로 채워지고 풍부해진 것이다.

인생 2막은 새 출발이다. 이 집이 그렇듯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예씨도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사를 오면서 세간을 크게 줄였다. 그는 “비워냈더니 오히려 여백이 생겨 좋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집은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겼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건축가 사무실 문턱은 여전히 높다. 김 교수는 “경제적이면서 좋은 집을 지으려면 건축가를 찾아라. 건축가는 돈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주의 성향과 열정을 보고, 돈에 구애받지 않고 도전하는 게 건축가다”라고 말했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