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평화 '빅딜'했다
  • 남문희 전문기자
  • 호수 4
  • 승인 2007.10.0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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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남북 정상선언 10개항에는 평상시 북한 처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수두룩하다. 김정일 위원장이 ‘통 크게’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요구한 것은 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남북 정상회담 첫날인 10월2일 평양 4·25 문화회관 앞에서 두 정상이 첫 인사를 나눴다.
 
 
때로는 ‘우연’이 역사를 추동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동기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착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표지석에 쓴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는 글귀에 그의 생각이 압축돼 있기는 하다. 그러나 먼 훗날 역사는 좀 다른 각도에서 그의 행보를 기록할지 모른다. ‘분단 극복과 통일의 첫걸음이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 문제에 깊이 관여한 한 인사에게는, 노 대통령이 평양에서 얻은 ‘평화·번영’의 어떤 성과보다,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던 그 장면이 강렬했다. 동·서독의 사례에서 보듯, ‘먼저 국경을 인정하고 그 다음 국경을 넘어서는 것’에서 분단 극복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1948년의 김구 선생 이래 59년 만에 그 길을 다시 밟은 노 대통령의 뒷모습에서 그는 분단 역사의 새로운 시작을 보았다고 말했다.
우연의 힘은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강력하게 작용했다. 평상시라면 어림없었을 그 ‘2007 남북 정상 선언’의 굵직굵직한 합의들. 그의 처지가 요즘처럼 힘들고 절박하지 않았던들 그게 가능하기나 했을까. 따지고 보면 오늘날 그의 처지가 이토록 어려워진 게, 바로 노 대통령이 지난해 미사일 발사를 이유로 북한에 주기로 했던 40만t의 식량을 주지 않았던 데에서 비롯했다는 점 역시 우연스럽다. 아니, 우연과 필연의 맞물림이라고나 해야 할까. 40만t의 식량 지원 중단으로 북한의 식량 배급 체계가 무너졌다. 식량 없는 겨울이 초래할 대기근의 악몽이 김 위원장의 등을 떠밀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회담은 사실 결론이 이미 나와 있는 것이었다. ‘극진한 영접, 통 큰 수용, 그리고 요구.’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 전략가들이 수립한 3대 방침이다(<시사IN> 3호. 2007년 10월9일 자). 약간의 오차는 있었지만 큰 흐름은 그대로 이어졌다.

먼저 극진한 영접. 애초의 방침은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 입구에 있는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에서 기다리고, 김영남 위원장이 군사분계선까지 내려와 노 대통령을 영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뇨를 앓는 것으로 알려진 김 위원장이 당일인 10월2일 당뇨 수치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차질이 빚어졌다(이번 회담 기간 김 위원장은 거듭해서 자신의 와병설을 부인했다). 당시 김 위원장의 몸 상태로는 3대헌장 기념탑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휴식을 취하며 기다리기에 적합한 4·25 문화회관으로 장소가 바뀌었고, 그에 따라 김영남 위원장의 군사분계선 영접 이벤트도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10월2일 김 위원장의 피로해 보이는 모습과 그 다음날의 활기찬 모습은 전적으로 컨디션 조절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 다음, ‘통 크게 수용한다’. 10월3일 오전· 오후 두 차례 회담을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개성공단 문제가 대표적이다. 오전 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개성공단에 대한 김 위원장의 불만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개성공단을 남한 측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는 ‘공단의 발전 속도에 대한 불만’ 따위로 대통령이 부분부분 언급해 전체 얘기를 알 수는 없지만, 개성공단이 ‘매우 성공적이고 만족스럽다’는 노 대통령의 인식에 김 위원장이 정면에서 제동을 건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일설에는 김 위원장이 ‘개성은 임가공하는 곳이지 산업 발전하는 곳이 아니지 않는가’라는 말도 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평양 지도부의 그간의 인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됐다고 할 수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0월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는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위원장(오른쪽).
 
두 정상, 개성공단 놓고 큰 인식 차이 보여

개성공단에 대한 양 정상의 인식 차이는 이번 회담의 향방을 좌우할 만큼 중대 변수였다. 노 대통령이 이번에 가장 역점을 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의 출발점이 바로 개성공단이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이 ‘성공적이고 만족스럽게’ 진행됐다는 것을 전제로, 해주에 ‘제2공단’을 만들자는 얘기가 가능해진다. 여기에 민간 선박의 해주항 자유 통행, NLL(북방한계선) 문제, 평화수역 문제 등이 모두 연동돼 있다.

그런데 개성공단이 성공적이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해주공단을 비롯한 그 뒤 모든 얘기의 전제가 무너진다. 이는 이번 정상회담 핵심 의제의 붕괴를 의미하고, 결국 정상회담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오전 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진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평상시 상황이었다면 개성공단의 성공을 전제로 한 남한 측 구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종전 선언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은 그동안 남쪽 일각에서 거론돼온 종전 선언, 평화협정, 4대국 정상회담 등에 시큰둥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번에 ‘한번 해보시라’며 대범하게 수용했다.

이처럼 ‘2007 남북 정상 선언’의 10개항 합의 중에는 평상시 북한의 처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대부분 북한의 심장부 평양을 둘러싼 서부 지역 개방에 초점이 맞춰진 내용들로 북한이 그동안 안보상 이유로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남북 응원단이 경의선을 타고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다든지, 개성-평양-신의주 간 철도 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한다는 발상이 평상시라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어차피 작심하고 시작한 회담이었다. 통 크게 타결한다. 못마땅한 점이 있어도 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고 내 사정도 얘기한다. 그렇다면 그가 얻고자 한 것은 어디에 있나. ‘2007 남북 정상 선언’ 제7항.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 동포애와 인도주의, 상부상조의 원칙에 따라 적극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는 항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8월의 대홍수 피해로 그나마 취약했던 식량 배급 구조에 또 한 번 결정타를 맞았다. 이대로 올겨울을 맞을 경우 북한 주민이 대량으로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자연재해로 인한 재난’으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에 대해 ‘동포애와 인도주의, 상부상조의 원칙에 따라 적극 협력’ 하자는 취지의 얘기가 뜻하는 바가 뭔지는 분명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0월4일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환영식에 참석했다.
 
 
쌀 40만t '인도적 지원' 요청한 듯

일각에선 10월3일 오후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고 노 대통령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회담이 순조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 회담에 앞서 북의 전략가들은 올겨울에 필요한 40만t과 내년 춘궁기 대비 30만t, 도합 70만t의 식량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을 곤란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지난해 남측이 주겠다고 약속한 40만t에 대해서만 요청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도 그동안 ‘인도적 지원을 무기화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며, 채무감을 느껴왔다고 하는데, 이 정도라면 국내도 충분히 설득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큰 틀에서 보면 이번 회담은 평화에 대한 노 대통령의 열망과 쌀에 대한 김 위원장의 절박함이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쌀과 평화의 빅딜’이라 할 만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대선 정국과 맞물려 야당과 보수 언론들이 또다시 대가성 운운하며 시비를 걸 소지는 있다. 그러나 그 엄혹했던 냉전 시절에도 미국은 소련에 대해 식량을 무기화하지 않았다. 오늘날 ‘식량을 무기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다른 건 몰라도 야당과 보수 언론 역시, 이런 점에 대해서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쌀과 평화의 교환으로, 북녘 2000만 동포가 올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고, 남한의 4000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결코 나쁜 거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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