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1일 밤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야권 단일화 토론회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트위터에서도 화제만발이었다. 실시간으로 가장 솔직한 평가를 내린 건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였다. “참 재미없네요.” 동감이다. 그것은 토론이라기보다 교양 있는 아저씨들이 사우나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11월27일 박근혜 후보의 토론은 글자 그대로 ‘재난’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단독 토론’이라는 콘셉트도 괴이했지만, 토론 전에 ‘대본’이 유출되어 논란을 일으킨 일은 참 민망한 해프닝이었다. 물론 스피치 능력은 국정 운영 역량과 별개다. 하지만 의사를 조리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인상이 굳어지면 신뢰감이 떨어진다. 박근혜 후보의 언어 감각은 역대 대선 후보 중에서도 최하위권이다.

대선, 이 지리멸렬한 ‘인질극’

토론도 토론이지만 문제는 대선 자체가 너무나 재미없다는 점이다. “대선이 너 재밌으라고 있는 줄 아느냐”라며 눈을 부라릴 우국지사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재미없는 건 그냥 재미없는 거다. 처음 박근혜·문재인·안철수 구도가 그려졌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흥미진진한 삼자 구도”라 평가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지루하고, 지저분하고, 지리멸렬했다. 단일화 협상의 온갖 잡음과 갈등이 시시콜콜 중계되어 사람들의 환멸만 깊어졌다. 5년마다 열리는 최대의 정치 이벤트인 대선이 재미없어진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많은 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건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icacy)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치적 효능감이란 정치학자 캠벨이 만든 개념으로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적 효능감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개혁 정권 10년과 MB 정권 5년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자신의 삶이 별반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체득하게 됐고, ‘그놈이 그놈’이라는 경험적 탈정치주의는 갈수록 단단해져왔다.

안철수 캠프와 문재인 캠프가 보여준 모습은 정치적 효능감을 더욱 떨어뜨렸다. 안철수 신드롬의 핵심은 신자유주의가 남긴 상처에 대한 정상화 내지 치유의 열망, 즉 ‘솔루션’이 아니라 ‘테라피’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링 위로 올라온 안철수의 개혁안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액티브X 폐기 공약만이 유일하게 칭찬해줄 만했다). 정당 조직이 없다는 것을 십분 감안해준다 해도 안철수 캠프의 대국민·대언론 커뮤니케이션에서 드러난 무능과 정책적 부실은 심각했다.

한편 문재인 캠프는 민주당과 참여정부라는 ‘원죄’가 있다. 한국 사회 최대 모순이라 할 비정규·불안정 노동을 확산시킨 책임의 상당 부분이 참여정부에 있다. 부동산 잡기에 실패한 것도, 지금 론스타 때문에 큰 문제로 비화한 투자자국가소송제(ISD) 등 독소조항을 포함한 한·미 FTA를 추진한 것도 참여정부였다. 문재인 캠프는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 극복해갈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시종일관 안철수 후보를 단일화라는 당위로 찍어 누르는 데 몰두했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모두 ‘복지’와 ‘차별 해소’를 내걸었지만 추상적인 수사에 그칠 뿐 구체적인 노동의 문제, 부의 재분배 문제 앞에선 한통속인 양 침묵해왔다. 사실상 이번 대선의 유일한 의제는 단일화였다. 반면 상대를 치열하게 비판하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대립적 의제는 실종됐다. 국가의 미래에 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수 있는 이 중요한 시기에 박근혜를 핑계로 ‘단일화 인질극’만 줄곧 이어졌던 것이다. 안 후보가 사퇴하자마자 대선은 곧바로 2002년이 아니라 2007년의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패자는 국민이다.

기자명 박권일 (〈88만원 세대〉 공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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