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은 여행자에게 두 가지 첫인상을 건넨다. 하나는 항공 촬영이라도 하려는 듯 낮게 비행해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직전까지 눈앞에 바투 펼쳐지는 도시의 광경.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항 내 짐을 찾는 장소에서부터 여행자의 무료함을 달래주려는 듯 애교스럽게 서 있는 간이 매점이다. 유럽 내 어느 나라의 수도에서 이런 특색을 목격할 수 있을까. 리스본은 시작부터 친근하다. 항공기 좌석에 앉아서 붉은 지붕의 행렬을 바라볼 때부터, 마치 레고 마을에 입성하는 듯 마음을 설레게 한다.

리스본에서 첫날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한국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초장부터 이상하리만큼 친근한 도시여서 자연스럽게 그런 것 같다. 결국 부러운 생활양식(?)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낮술의 효용성이다. 일단 리스본에서는 낮술을 일회용 커피쯤으로 여긴다. 나는 리스본 사람들이 어떤 가게 앞에 긴 줄을 서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일회용 소주잔을 들고 나오기에 “설마 저게 술은 아니겠지” 했다. 기껏해야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정말 술이었다. 테이블 하나 없는 술집에서 바텐더가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아주 활기차게 인사까지 건네며 말이다. 한 잔에 1.1유로(약 1500원). 리스본의 소주라고 할 수 있는 진지냐(Ginjinha)다.

1800년대 초부터 리스본 사람들은 독하고 단 체리 브랜드인 진지냐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만약 오전부터 친구나 동료를 만났다면, “한잔 하고 시작할까?”라는 인사를 건넨 후 딱 한 잔씩 진지냐를 마신다. 또한 이 도시에는 쌀을 주재료로 한 365가지 요리가 존재하고, 겨울에는 여지없이 카스타냐스 아사다(Castanhas Assadas), 즉 군밤을 파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비슷하긴 하다. 경제 불황으로 약간의 근심이 늘었다는 것 또한.

한때 포르투갈은 세계를 호령하던 강국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최고의 영웅으로 꼽는 바스쿠 다가마가 아시아로 가는 무역로를 열었고, 그 후 포르투갈의 함선과 무역선은 대항해 시대의 주역이었다. 리스본 관광청 직원의 말에 따르면, “타호(Tajo) 강변의 항구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온 금은보화가 쌓여 있고 코끼리와 원숭이가 돌아다니던 때”이다. 1755년 11월1일 도시 인구의 10%가 사망한 최악의 대지진을 겪었지만, 이전에 쌓아둔 막대한 부가 있었기에 금방 도시를 재건할 수 있었다. 그랬던 포르투갈은 최근 들어 유럽 재정위기로 좀 기울었다. 이른바 문제아 빅3(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중 하나다. 이런 재정적 어려움은 리스본이 의욕적으로 키우려 했던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경제난으로 완공 미뤄져

리스본 구시가지인 바이사(Baixa)의 아우구스타 거리(Rua Augusta)에는 MUDE(Museu do Design e da Moda, 디자인과 패션 미술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20세기 이후의 디자인과 패션을 중점적으로 전시하는 곳으로 세계의 그 어떤 현대 디자인 미술관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물론 이곳의 설립 배경에는 포르투갈 최고의 컬렉터 중 한 명인 프란시스코 카펠로(Francisco Cappello)의 용단이 있었다. 카펠로는 2002년 리스본 시에 1930년대 이후 세계 디자인계에 족적을 남긴 작품 2500여 점을 기증했다. 그때로 약 660만 유로의 가치를 지닌 컬렉션이다. 리스본 시는 이 컬렉션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864년 지은 울트라마리노 국립은행(Banco Nacional Ultramarino)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구시가지의 다운타운을 변화시키는 기폭제 노릇을 하게 한 것. 이런 노력의 결실로 리스본 시는 드디어 2009년 MUDE의 1, 2층 전시장을 개관했다.

MUDE의 1층은 상설 전시장. 카펠로의 컬렉션을 연대순으로 전시하는 공간이다. 패션과 산업 디자인의 경계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각 영역을 무시하고 한 시대를 관통하는 디자인 결과물을 한데 모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전시 구성은 컬렉션의 면모를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니까 디자인 교육에도 도움이 되는 아카이브가 될 터이다. 실제로 관람 도중 간이 의자를 가져와서 도슨트의 설명을 경청하는 학생 단체 관람객을 몇 명 볼 수 있었다. 실내의 벽체를 노출했기 때문에 공간 자체가 지닌 에너지도 꽤 세다. 그 안을, 소유욕을 흥건히 자극하는 작품으로 가득 채웠다. “아, 가지고 싶다”라는 감탄사가 슬며시 나오려 한다. 역시 디자인의 미덕은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코코 샤넬과 크리스찬 디올을 거쳐 라프 시몬스와 드리스 반 노튼까지, 브루노 무나리와 디터 람스를 거쳐 론 아라드와 마크 뉴슨까지. 오트 쿠튀르 의복, 가구, 전자제품, 스쿠터, 자동차까지 상상할 수 있는 시대의 디자인 아이콘은 다 모은 듯하다. 관람 내내 입고, 앉고, 눕고, 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괴롭다.

전통적인 미술관의 개념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공간, 활기차고 실험적이며 개방적인 공간, 지역 디자이너와 해외에서 온 관람객이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MUDE의 목표라고 한다. 구시가지에 이렇게 크리에이티브한 공간이 생겼으니 확실히 문화의 자극제가 될 법하다. 그런데 잠깐. 2층의 기획 전시관까지 관람하고 나니 이게 전부란다. 2년 전 자료에는 분명히 ‘내년’, 즉 2011년에 완공된다고 써있는데, 아직 8층짜리 건물의 반의반만 들어차 있다. 계획대로라면 영화관·공연장·레스토랑 등이 이미 문을 열었어야 하고 지금보다 더 엄청난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약간은 자신 없는 말투로 ‘내년쯤’이면 완공되는 것을 ‘목표’로 한단다.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밀려오는 씁쓰레한 감정이란. 무언가 빼앗긴 기분이다.


✚ MUDE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입장료 무료,  www.mude.pt

✚ 볼 곳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 Elevador de Santa Justa

건축가 에펠의 제자 라울 메스니에르(Raul Mesnier)가 만든 고딕 양식의 엘리베이터 건축물로 1902년 완공됐다. 꼭대기에서는 바이사 구시가와 강변이 훤히 보인다.

✚ 머물 곳
바이루 알투 호텔 Bairro Alto Hotel

리스본의 유흥 지역 바이루 알투에 있는 최고급 부티크 호텔이다. 세련된 디자인의 객실과 전망 좋은 6층의 바가 자랑. Praca Luis de Camo˜es 2, www.bairroaltohotel.com

✚ 먹을 곳
비카 도 사파토 Bica do Sapato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가 공동 소유한 부둣가의 고급 레스토랑이다. 아래층에선 현대적으로 해석한 포르투갈 요리를, 위층에선 초밥을 먹을 수 있다. Cais da Pedra a Bica do Sapato, 351-218-810-320

✚ 즐길 곳
아 진지냐 A Ginjinha

중심가인 상 도밍구스 광장 옆에 있는 작은 진지냐 바(bar)다. 회사원·노인·여행객 누구나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리스본의 명물이다. Largo de Sa˜o Domingos 8

기자명 허태우 (〈론리플래닛 매거진코리아〉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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