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
주인이 가게를 비운 사이,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점원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차피 여기는 단골 장사예요. 이미 숱한 분이 다녀갔는데 데이터 관리가 안 되고 있어.’ ‘어제 내가 와서 배치를 싹 바꿔버렸어. 도예 작가 분한테는 미안하지만, 서원의 주인은 책이잖아.’

주인보다 객(客)이 더 가게를 꼼꼼히 챙기는 진풍경이 연출되는 곳. 지난 2월25일 서울 통인동에 새로 문을 연 길담서원(cafe.naver.com/gildam)의 풍경이다. 길담서원의 서원지기는 대학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박성준 교수(성공회대 NGO학과)이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3년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던 탓에 두 사람의 이름은 순애보와 신뢰의 표상처럼 불리곤 했다.

아내의 총리 지명으로 계약금 날리기도

사실 박 교수는 2년 전에도 같은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아내가 덜컥 총리로 지명되고, 총리실에서 검토한 뒤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계획을 접어야 했다. 계약금 수백만원을 그냥 날렸다. “계약금 돌려달라는 말이 나오지를 않더라고. 어쨌든 이쪽 사정이었으니까.”

‘이렇게 좋은 곳에 자리잡으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지금 서점의 입지에 몹시 흡족해했다. 청와대와 경복궁이 있는 한, 크게 변하지 않을 효자동 언저리의 풍광과 느낌이 좋아서이다. 처음부터 그곳에 둥지를 틀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가진 돈과 조건을 저울질하다 보니 최적지로 떠오른 것. 근처에는 같은 이유로, 다양한 단체가 둥지를 틀고 있어 외롭지 않다.

서점을 다시 열기로 작정한 뒤, 그는 전범이 될 만한 곳을 물색했다. 바깥에서는 파리의 셰익스피어&컴퍼니가 눈에 들어왔고, 국내에서는 부산의 인디고 서원과 서울 혜화동에 있는 이음아트의 활동이 눈에 띄었다. 거래하기로 한 총판에서 최근 두 달 동안의 베스트셀러라며 목록을 건네주었다. 무려 4000권이었다. 게다가 베스트셀러는 많은 경우 좋은 책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처음 비치할 책을 고르는 일을 박 교수가 직접 맡았다.

ⓒ시사IN 안희태길담서원(위)에서는 책도 사고, 차도 마시며, 소모임도 꾸릴 수 있다.
노트북을 들고 부산의 인디고 서원과 대학로 이음아트를 찾아가 하나하나 목록을 기록했다. ‘그들도 힘들게 만들었을 소장 목록을 거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다. 거기에 본인의 판단을 더해 1차 목록 1500여 권을 완성했다. 길담서원의 최대 수용량은 5000권이다. 그는 “5000권 정도가 항상 고여 있을 것이고, 어떤 책을 내보내고 어떤 책을 들여올 것인가는 내가 아닌, 앞으로 서원을 찾는 이들이 결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간 위주로 꾸며진 여느 서점과 달리 길담서원에서는 몇 년 전에 나온 책이라도 여전히 추천할 만하면 가장 눈에 잘 띄는 서가에 버젓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처음에는 ‘왜 굳이 책방이냐. 되는 걸 해야지’라며 시큰둥하던 아내도, 막상 인테리어까지 마친 서원을 보고는 왜 그렇게 하고 싶어했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란다.

파리의 명물 ‘셰익스피어&컴퍼니’처럼…

그에게 독서는 인생의 또 다른 반려라고 할 수있을 만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전쟁 통에 부모와 헤어져 고아가 된 그는, 초등학교도 학교 측의 배려로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이후 제대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중·고등학교 급사 생활을 하며 남의 책을 베껴가면서 공부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한 뒤 경제복지회를 만들었다. 그가 회장을, 아내 한명숙 전 총리가 부회장을 맡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긴 수감 생활에 들어간 뒤 책은 더 각별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옥의 유일한 위안은 독서였다. 책의 힘으로 버텼다. 지금도 그 습관이 남아 설혹 책 읽을 시간이 없어도 책은 산다”라고 그는 말했다.

박 교수는 일상에 쫓기는 사람을 위해 독특한 독서론을 펼쳤다. 서점에서 좋은 책 표지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각성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책 제목과 요약문, 그 속에 담긴 신선한 언어가 내 속으로 들어온다.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코드와 접할 수 있다. 닫힌 사고에 신선한 언어가 들어와 정신적 발효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책을 펴드는 순간,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다.”

그는 문화 카페 노릇을 하면서 파리의 명물이 된 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 같은 곳을 꿈꾼다. 자신이 직접 찍은 것이라면서 서점 사진을 표구해놓고 자랑스레 보여주기도 했다. 외관이 마음에 들어 자기도 흉내를 내어보았노라고 말하기도 했다(영화 〈비포 더 선셋〉에서 남녀 주인공이 10년 만에 조우한 낭만의 명소이다. 그 서점의 내력에 관해서는 건립자가 직접 쓴 동명의 책 〈셰익스피어&컴퍼니〉(뜨인돌 펴냄)가 번역되어 있다).

 원래 건물 외관은, 문이 한쪽에 치우친 전형적인 소규모 빌딩 구조였다. 그는 1층을 빌린 뒤 가운데 출입문을 새로 내고 양쪽 벽체를 허물어 통유리를 끼웠다. 내친김에 건물 위층도 임대 기한이 차면 새로 빌리고 싶다고 한다. 역시 셰익스피어&컴퍼니처럼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고 싶어서다. 그는 천진한 표정으로 묻는다. “한 달에 한 번쯤은 집에 안 들어가도 되지 않겠어요?”

ⓒ시사IN 안희태
그렇게 소박하게 멋을 부린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또한 매우 소박하다. 골목길은 울퉁불퉁하고,  누군가 내다버린 냉장고가 비뚜름하게 서 있다.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음식점 ‘장생포 원조고래맛집’ 간판과 기왓장이 성하지 않은 지붕 모습이다. 고즈넉한 풍경이 아니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그가 일상의 인문학을 꿈꾸고 보통사람을 위한 옹달샘을 원한다면 이런 풍경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곳에서는 책을 보며 차를 마실 수 있고, 가끔 영화와 음악 감상회도 열린다. 소모임을 위한 공부방도 제공된다. 그의 꿈은 이 서원을 지역 주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는 “한번 해보니 자신감이 붙었다. 통째로 넘겨주고 나는 다른 곳에 이런 서원을 열고 싶다”라며 웃었다.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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