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예능의 새로운 강자였다. KBS 〈1박2일〉과 겹치는 시간대였고, MBC 〈무한도전〉의 ‘말하는 대로’ 편 콘셉트와 닮았다. 트위터에서 ‘말한 대로’, 오프라인 토론이 성사됐다. 11월11일 90분간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사망유희’ 토론 배틀 1편이다. 그간 트위터로 140자 이내의 조롱과 비난을 주고받던 진중권 동양대 교수와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가 대면한 자리, 글 대신 말과 제스처를 동반한 비꼼의 향연이 이어졌다. NLL(북방한계선)이라는 토론 주제보다 각자의 승리를 자신하던 두 사람의 승부에 누리꾼의 관심이 집중됐다. 시작 30여 분 만에 생중계 서버가 다운될 정도였다.

이소룡의 영화 〈사망유희〉처럼 1층부터 차례로 적을 무너뜨리는 방식의 토론을 제안한 변 대표는 애초 보수 인사 10명 중 마지막 주자로 자신을 지목했지만 ‘인사들’의 스케줄과 거절로 1층부터 ‘선수’로 나서게 됐다. 굳이 ‘토론이 실종된 대통령 선거의 대안’이라는 의미 부여가 없어도 흥행은 성공이었다. 접속이 몰려 중계가 끊기자, 채팅방이 활발해졌다.

 

 

11월11일 오후 7시35분 당시 흥행 중인 채팅방은 4개. ‘진중권님 승이라고 생각하면 콜’ 채팅방에서는 500명, ‘희재갑’ 방에서는 422명, ‘일베’ 방에서는 189명, ‘오유’ 방에서는 148명이 대화 중이었다. 변희재·일베, 진중권·오유 둘로 이원화되는 양상이었다.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와 오유(오늘의 유머)는 둘 다 유머 사이트다. 일베 방에선 대체로 변희재의 선전을 기뻐했고, 오유 방 사람들은 진중권의 준비 부족을 탓하며 아쉬워했다. 특히 일베 방에서는 ‘희재갑이 진짜 개념인이다’ 따위 응원 글뿐만 아니라 이유 없이 전라도를 비하하는 ‘홍어’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오유 게시판 역시 ‘박정희 개XX’ 등 토론과 관계없는 발언에 이어 ‘운지, 홍어, 엣햄 발언은 강퇴’(각각 노무현, 전라도, 오유 사용자를 비하하는 말로 일베 게시판에서 자주 쓰인다) 방침이 올랐다.

일베와 오유는 유머 사이트 분야에서 이용 순위 1~2위를 다툰다(랭키닷컴 11월13일 기준). 정치·사회 분야 이슈에서는 좌우로 그 이념적 성격이 분류되기도 한다. 1999년 시작된 오유는 ‘MLB파크’나 ‘루리웹’ ‘클리앙’ 등과 함께 각종 유머·시사 관련 논의가 활발한 곳이다. 반면 2010년 ‘디시인사이드’에서 파생된 뒤 급격히 덩치를 키운 일베는 ‘우파의 놀이터’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씨의 입을 빌리면 ‘네오 라이트 덩어리의 일부이자 전위’이고 저널리스트 고종석씨에 따르면 ‘일베는 배제를 행동원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주사파의 짝패!’다. 반면 한 극우 인터넷 매체는 ‘커뮤니티 사이트 중에서도 애국적 시각이 강한 곳’이라고 정의한다. 일베의 ‘정치 일간 베스트’를 봐도 종북·좌좀(좌파 좀비) 따위 단어가 많이 보인다. 우익 시민단체 ‘남성연대’에 대한 후원금 납부 인증 사진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박사모 노땅들은 일베 자료 좀 퍼가라’는 조언도 추천 수가 높다.

또 다른 사이트 ‘오유’와 사사건건 대립

상징적인 건 ‘민주화’라는 단어의 쓰임새다. 일베 게시판에선 ‘민주화’가 조롱의 의미로 쓰인다. 게시 글마다 ‘추천’과 ‘비추천’ 대신 ‘추천’과 ‘민주화’가 있다. 여자 친구한테 차여도, 선생한테 혼나도 ‘민주화 당했다’고 표현한다. 일베 세계에서 민주화는 부정의 총칭어다.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그런 커뮤니티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가르치려는 태도다.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른바 진보라는 사람들 특징이 가르치려는 거다. 기분은 나쁜데 담론으로 접근은 안 되고 자기들 언어는 찾아야겠고, 그래서 박정희·전두환 때 자료를 찾기도 한다. 말하자면 안티를 위한 안티인 셈이다”라고 말한다.

이번 토론 배틀의 시작도 일베였다. ‘사망유희’ 이전, 일베에서 활동하는 ID ‘간결’이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진 교수에 대해 거짓말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진 교수가 ‘수꼴 여러분, 인터넷TV 토론 할까요?’라며 100분 출연에 100만원을 불렀다. 실제 한 누리꾼이 입금을 해 토론이 진행됐다.

 

일베와 진 교수의 전적은 또 있다. 지난달 사이트 회원들이 일베는 ‘찌질이’ 집합소가 아니라며 고학력 인증 게시글을 연이어 올렸다. 진 교수는 ‘찌질함에는 학력의 고하가 없다는 사실의 실천적 증명’이라며 한 방 날렸다.

이번 토론 배틀 때 변희재 대표가 내건 ‘딜’의 조건은 소송 취하였다. 토론에 응하면 진 교수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을 취하하겠다는 것. 공부를 열심히 했다며 지도 그림 패널까지 준비하는 성의를 보인 변 대표와의 토론 후 진 교수는 “변희재가 오늘은 토론 준비를 철저히 해왔더군요. 팩트에서 밀렸습니다”라고 인정했다. 젠틀함은 여기까지였다. 오유 게시판에 변 대표의 자료가 틀렸다는 반박 글이 올라왔고 진 교수 역시 이에 동의했다. 변희재 대표는 “오유 알바들과 함께 진중권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하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일베 역시 진중권의 비겁함을 비난하며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사망유희의 처음과 끝엔 유머 사이트가 있다. 

일베는 2010년께 디시인사이드에서 파생됐다. 〈우리는 디씨〉의 저자 이길호씨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우파의 활약이 두드러진 건 ‘광우병 촛불시위’ 이후였다. 노무현 탄핵 당시 촛불시위를 주도한 ‘디시인사이드’ 유저가 광우병 시위 종반부에 들어서자 급속히 우경화되었다. 이씨는 “기존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세를 확보하고 일종의 헤게모니를 쥐니까 그 반감으로 몰아내는 작업을 했다. 조직적이기보다는 애초에 권력이 오래 지속되는 걸 못 보는 게 게시판의 특성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 이전 2004년에 있었던 이른바 ‘여옥대첩’ 역시 하나의 기점이었다. 전여옥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은 디시인사이드 ‘정치사회 갤러리’ 논객들과 호프집에서 만났다. 평소 게시판에서 '전녀오크'라고 그녀에게 비난을 퍼붓던 논객들이 힘을 못 썼다. 이를 계기로 진보적 논객이 힘을 잃었다. 이씨는 “이처럼 게시판의 우경화엔 몇 가지 맥락이 있다. 그런데도 단순히 현실논리를 적용해 ‘유머 사이트를 이용하는 건 잉여나 청년백수, 그러니 사회적 약자고 야권 성향일 텐데 보수를 대변한다? 그럼 알바다!’ 이렇게 해석하는 건 곤란하다”라고 말한다. 게시판 이용자를 세대나 계급으로 구분 짓는 종전의 해석 역시 신빙성이 없다는 시각이다.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오유와 일베가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해석한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건 놀이다. 반호남 정서도 정말 호남으로부터 차별받아본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유 역시 제노포비아, 호모포비아 등의 정서가 강하다. 오원춘 사건 당시 조선족에 대한 혐오가 대표적이다.”

진중권 교수는 토론 성사 전 말했다. “이 토론, 첫 회는 재밌게 볼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웃 오브 안중. 반복되는 거 좋아할 사람, 없겠죠?” 볼만했던 주말 예능은 이대로 사라지는 걸까. 이길호씨의 예측은 다르다. “두 사람의 싸움은 핵심이 아니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싸움 너머 무수한 다른 실재가 아닐까. 토론이야 누구로 대체되더라도 그 너머의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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